■.羅州 의 본관(本貫)성씨(姓 氏)
198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성씨별 인구로는 김(金)씨가 993 만 명에 21.6%를 차지했으며
다음은 이(李)씨로 680만 명에 14.8% 다음은 박(朴)씨로 390만 명에 8.5% 네 번째인 최(崔)씨는 217만명 에 4.7% 다섯 번째인 정(鄭)씨는 4.4%에 201만 명으로 조사 되었으며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한 한국에는286姓에 3349본관(本貫)이였고 2003년 1월29잂 통계청 이 발표한 2002년도 인구주택 조사에 의하면 현제 286개 성씨에 4,179개의 본관(本貫)으로 김 씨가 가장 많은 21.8%이며 1985년도 순위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정씨는 64개 본관에 618,049의 가구 수에 1,982,640명으로 동래 정씨가 가장 많은 137,524가구에 442,363명이며 가장 적은 옥천 정씨(鄭 氏)는307가구에 1,050명이고 한편 본관별로는 김해김씨(金海 金氏) 다음은 밀양(密陽)박씨(朴 氏),그리고 전주(全州)이씨(李 氏)며 경주김씨, 경주이씨 였다. 한편 경주에 본관(本貫)을 둔 성씨가 87개로 가장 많았으며 진주, 전주, 밀양, 청주, 등의 순 이였다. 여기서는 나주(羅州)를 관향(貫鄕)의로 하는 씨족(氏族)중 년원(年原)이 분명한 씨족의 연원과 인구와 가구 수를 간략 하게 소개(紹介)한다. 우선나주를 관향으로 하는 17성씨의 내력과 1,000명 이상 거주 인구가 되는 성씨를(가, 나, 다, 순) 나열하겠다.
(1) 나주 김씨(羅州 金 氏)
시조(始祖)김 운발(金 雲 發)은 新羅경순왕의 둘째 아들인 김굉 의 맏아들이다. “조선(朝鮮)씨족(氏族)통보(統 譜)”의 기록에 의하면 김 굉 은 신라가 망하자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法名)을 범 공(梵 空)으로 하여 불가로 귀의(歸意)하였는데 그가 입산하기 전에 고려(高麗)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첫째아들 김 운발(金 雲髮)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나주(羅州)군에 봉(奉)하고 둘째아들 김 우발(金 偶發)은 경주 군(慶州 君)에 봉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운발(雲髮)을 시조(始祖)로하고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누대에 걸처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긍지를 심었다. 2002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나주(羅州)김씨(氏)는 남한에 총 14,387가구에 46,4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2) 금성(錦 城)나(羅)씨(氏)
당나라 태종 때 상서좌복야 나 지강 이 고구려(高句麗)정벌을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亡命)하여 발라 현 인 나주(羅州)에 정착 한 후 신라(新羅)때에 벼슬인 좌승(左丞)상에 이르렀다. 그 후 신라 효공왕(孝恭王)때 에 나경이 나주사손 으로 봉(奉)해지고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였으나 후손의 기록이 없어져서 고려(高麗)초(初)에 삼한벽상 일등공신(一等功臣)인 나 총례(羅 聰 禮)를 시조 로 나유(羅裕:?~1292)) 는 충렬왕14년(1288년)무자년 5월 신축일. 만호(萬戶)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나유(羅裕)가 군사를 거느리고 원나라 원정길에 나섰다. 나주 나씨(羅州羅氏) 집안으로 원종~충렬왕 때 음서로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로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견룡행수(牽龍行首)·대장군을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상장군(上將軍)·세자원빈(世子元賓)을 역임했다. 이 집안은 삼한공신(三韓功臣) 나총례(羅聰禮)의 후손으로 나득황(羅得璜)이 최항(崔沆)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고 원종대 이후 나유(羅裕)—나익희(羅益禧) 부자가 계속 고위 관직에 오르면서 세족의 기반을 갖추었다. 특히 나유는 삼별초(三別抄) 항쟁군의 진압과 여원(麗元) 연합군의 일본정벌(日本征伐) 및 카다안[哈丹] 침입의 격퇴 등을 통해 전공을 세우고 원나라로부터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이라는 직함을 받았다.그후 충렬왕18년(1292년)임진(壬辰)년6月정축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나유(羅裕)가 죽었다.{김용선 편, 「나익희(羅益禧) 묘지명」·「조위(趙瑋)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김광철, 『고려후기 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84~85쪽 및 [나주 나씨] 세계도.최영호, 「13세기 중엽 조문주의 활동과 정치적 성향」 『한국중세사연구』 16, 2004.} 그후 英祖때에 무신(戊申)흉변(凶變)으 화를 면하려고 나주(羅州)의 옛 이름인 금성(錦城)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그러나 나 총례 의 후손이면서 아직도 본관을 옛 본관인 나주를 바꾸지 않고 羅州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계통도 있고 안정, 군위, 수성 등으로 본관을 하는 계통 도 있다.
2002년 통계조사 시 금성 羅씨는 남한에 12,869가구에 40,493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3) 나주(羅州)나 씨(羅 氏)
당(唐)태종 때에 수선 관 을 지낸 나부(羅 富)를 시조(始祖)로 하고 여황(艅 艎)羅 氏 로 하였으나 고려(高麗)성종(成宗)때 여황이 나주(羅州)로 바뀌면서 羅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을 알 수가 없어 나 득 규(羅 得 虯)를 中시조(始祖)1세조(世祖)로 하고 있다.
2002년 통계청 나주(羅州)나(羅)氏 기록결과는 남한에 총 33,600가구에 108,139명이 조사 되었다.
(4) 남 평 문 씨(南 平 文 氏)
시조 문 다 성(文 多 省)은 신라(新羅)20대 자비(慈悲)왕 때의 사람으로 출생(出生)에 대한 전설(傳說)이 전해온다. 남 평 현(南 平 縣)지금 으 전남 나주시 남 평 읍 장 자리 에 있는 장자지(長 子 池)라는 연못가에 큰 바위가 있다. 472年 新羅 자비왕15년 2월에 군주가 바위아래서 놀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서 오색기운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여긴 군주(君主)가 사다리를 가져 오게 하여 올라가보니 돌로 된 함안에 피부가 백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갓난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그 군주가 대려다 키웠는데 다섯 살에 글을 저절로 깨우치고 무략이 뛰어나며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등 총기가 있어 성을 “문” 이라고 하고 이름을 다 성(多省)이라고 했다. (돌로 된 함에 “문“ 자가 새겨져있어 성을 ”문“이라고 했다고도 한다.)그 후 500년 지증왕(智證王)1년에 중시 아랑(中侍 餓狼)이 되고 540년 진흥왕(眞興王)원년에 대 국사(577年)진지왕(眞智王)2년에 대아랑 대국 사가되었다. 지금도 그곳 장자지 연못에는 6미터쯤 되는 바위가 있고 바위위에 ”문 암”이라는 비석(碑石)을 세워놓아 文 씨 시조(始祖)의 탄생지(誕生地)임을 말해주고 있다. 장자 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다고 한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 평 문 씨 는 남한에 총 118,491가구에 380,530명 으 로 조사 되었다..
(5)나주(羅州)박(朴)氏
시조(始祖)병 묵(炳 黙)은 나주에 토착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 했고 그의 아들 덕 영(德 瑛)은 호군(護軍)으로 연 성군(蓮 城 君)에 봉(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병 묵 을 시조로 하고 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그의 선조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병 묵 의 손자 숙(璹)이 조선이 개국(開國)된 후 이조(吏曹)판서(判書)에 올라 정랑을 지낸 아들 선문(瑄 文)과 사복시정을 역임한 손자 제창(濟 昌)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 밖의 인물로는 판관(判官)을 지낸 제창의 손자 와 무신(武臣)으로 유명했던 덕명(德 命)이 뛰어났으며 장 사 랑(將 仕 郞)에 오른 순영(淳 英)은 의관(議官)을 역임한 순택(淳 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나주(羅州)박(朴)氏는남한에 총 1,010가구에 3,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6) 반 남(潘 南)박(朴)氏
시조(始祖)박 응 주(朴 應 主)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선조를 알 수가 없으나 반 남 현(羅州)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호장 을 지냈고 그의 6세손 박은(朴 訔)이 조선 초기 왕자의 난 때 태종(太宗)을 도와 익대 동덕(翊 戴 東 德)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좌의정에 이르렀고 반 남군(潘 南 君)에 봉(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박 응 주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반 남(潘 南)으로 하였다. 박 은(訔), 박 숭 질(崇 質),박세채, 박 종 악, 박종훈, 박 회수 등과 상신, 박 태상, 박 규수, 등의 대제학(大提學) 의 박세당(世 堂), 박 지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박소, 박 응 남, 박 응 복, 박 태보, 등의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215명, 삼신7명, 대제학2명, 왕비2명과 조선후기에 판서 급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박(朴)씨 중에서 벼슬이 가장 화려 하다. 2002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 하면 반남 박(潘 南 朴)씨는 남한에 총 43,300가구에 239,4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기를누설한 박지관 (반남박씨의 전설(傳說)
반남 박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을 지낸 박응주인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박의는 이웃마을에 사는 박씨 성을 가진 지관을 모셔다가 명당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박지관은 고개 너머 자미산(자미산성이 있는 산)의 느긋한 산허리를 둘러보더니 덕흥리 동쪽에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풍수 지리라면 박의도 조금은 아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박지관이 잡아주는 자리보다 차라리 그 밑이 더 좋을 듯 싶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박지관이 정해주는 곳이라 우선 표를 찍어놓고 속으로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박지관의 뒤를 밟아 보았다. 집으로 돌아간 박지관이 부인의 마중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박의는 재빠르게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부인이 "호장어른 묘자리는 괜찮은 데로 잡아 드렸나요?"라고 묻자 박지관이 기막힌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가르쳐 줬다가는 아무래도 천기를 누설한 죄로 화를 입을 것 같아 그 자리를 살짝 피해 좀 위쪽에 있는 자리를 잡아주었지. 그 자리도 무던합디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박의는 이튿날 박지관이 말한 천하의 명당에 무덤을 쓰기로 하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이를 도와주려고 고개를 넘어온 박지관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박의에게 "왜 내가 잡아주는 자리는 피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자리가 더 좋을 듯 싶어서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박지관은 "이것은 모두가 운명일세. 사실 자네가 파는 이 자리가 명당일세. 내가 화를 입을 것같아 입을 다물었는데 자네가 알아냈으니 자네 가문의 복일세"라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런데 박의가 다시 구덩이를 파려고 하니 구덩이에서 새만큼이나 큰 벌이 솟아 나오더니 고개로 넘어가던 박지관의 뒤통수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후 고려 때의 아전이었던 박응주의 후손은 현손 박상충이 예조정랑에 이르고 이어 벼슬실이 끊기지 않아 조선시대에 반남 박씨는 명문거족이 되었다. 이를 두고 후손들은 명당의 발복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박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고개를 '벌고개'라 부르고, 박응주의 묘자리를 '벌명당'이라 부르고 있다. 박씨 문중에서는 벌고개 바위에다 이를 기려 '峰峴'이라 새기고, 오늘날까지 매년 시월 보름날 박지관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한다.
(7) 금성 범 씨(錦 城 范 氏)
시조 범 승조(范 承 組)는 원래 원나라의 예부시랑 으로 고려(高麗)충렬(忠烈)왕비(王妃)인 제국대장공주를 배종(背腫)하여 우리나라에 와 나주(羅州)에 터를 잡은 것이 범 씨의 시초다. 그의 아들 범 유수(范 有 脽)는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여진의 난에 참가 하여 평한 공으로 공훈 1등에 금성 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금성(錦 城)으로 하였다. 범 씨의 본관은 금성, 광주, 안주,3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仝 原)이므로 현재는 금성 범 씨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2002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르면 금성 범 씨는 남한 에 총900가구에 2,991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8).남 평(南 平)서씨(徐 氏)
시조(始祖)서호(徐 灝)는 서신일(徐 神 逸)의 후손으로 남 평 에서 대대로 살아왔고 그의 손자인 서지(徐 祉)가 조선(朝鮮)10대(代)왕인 연산군(燕山君)때 문과에 급재 하여 중종(中宗)때 이조 판서에 올랐다 .그래서 이천 서 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남 평 을 본관으로 하였다.
2002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남 평 서 씨는 남한에 총 361가구에 인구수가 9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 나주 양씨(羅州 梁 氏)
나주 양씨 시조(始祖)는 양열(梁 悅)으 아들로 조선 중종조(中 宗祖)에 문과 출신으로 도사(都事)를 역임한 양인(梁 認)이다. 이 성본의 연한은 접할 수 없고 다만 2002年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514가구 인구 1,671명이 거주 하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10).나주 오씨 (羅州 吳 氏)
羅州 오(吳)씨의 시조(始祖)오 숙 규(吳 淑 珪)는 고려(高麗)중엽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도 시조(道 始祖)오첨 의(僉 義) 24세손 (해주오씨의 시조) 의아들 5형제 중 다섯째 아들이다. 그 후 3대에 걸친 후손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오 숙 규를 시조로 하고 오 숙 규 의 5세손 오언(吳 偃)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오언은 고려 때 중랑장(中 郞 葬)을 지내고 그의 5세손 오 자치(吳 自治)가 조선(朝鮮)세조(世祖)때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나주 군(羅州 郡)에 봉해지자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또 하나의 설은 나주오씨 시호를 903년 이전에 후백제 금성지역의 호족들 중 도서연안세력[島嶼沿岸勢力:오다련(고려2대 혜종(惠宗)의 외조부)영산강하구의 연안세력(沿岸勢力)과 영암의 최 지몽 이끄는 세력(勢力)그리고 압해도의 능 창 이 이끄는 도서해양세력(島嶼海洋勢力)의 도움으로 王建이 백재의 땅인 금성(錦 城)을 함락 받은 궁예(弓裔)는 금성을 羅州로 개칭하고 王建의 계급을 올려 알찬(閼粲)으로 삼으면서 호족 중 도서연안세력 오다련 에게 羅州오씨(吳 氏)시호 와 나 종례 에게 羅州나씨(羅 氏)시호를 하사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삼국사기 궁예 전(三國史記弓裔 傳)”에는 나주지명 개칭을 911년이라고 기술되어 다소 혼란스럽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 오(吳) 씨는 남한에 총 7,916가구에25,5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1).나주 이씨(羅州 李 氏)
시조 이 철우(李 哲 祐)는 누대에 걸 처 나주(羅州)에 토착(土着)세거한 사족(士族)으 후손으로 조선(朝鮮)세조(世祖)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으며 평남(平 南)개천(開川)군 마장으로 이거 하였다. 그리 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의 전(前) 세거지(世居 地)인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무술 보(戊戌 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시대 판 문하부사(判 門下府使)를 지낸 문 정공(文 靖 公) 이색(李穡: 한산 이씨)의 7세손 이라고 했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이씨는 남한에 총1,988가구에 6,2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2). 남 평 이 씨(南 平 李 氏)
시조는 이 동 말(李 東 秣)이다. 조선조에 정헌대부(正 憲 大夫)에 올라 병조 판서를 역임 한 후 보조 공신(輔助 功臣)으로 녹훈(錄勳)되어 남 평 군(南 平 郡)에 봉해 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동 말(東 秣)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을 남 평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 평 이 씨는 남한에 총 299가구에 1,0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3). 나주 임씨(羅州 林 氏)
시조는 고려 의 대장군(大將軍) 임 비(林 疪)이다. 1281년(고려 충렬왕 7년)왕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시종 보좌 공신 2등에 책 록 되고 대장군(大將軍) 충청도(忠 淸道) 도(都)지휘(指揮) 사판 사재사가(使 判 司 宰 寺 事)에 이르렀다. 임 비 의 9세손 임 탁(林 卓)이 해남(海 南)감무(監務)를 지내다가 이성개가 조선을 개국 하자 관직을 버리고 회진으로 돌아가 살면서 본관을 회진(會 津)으로 하였으나 회진 현이 나주에 속해 짐에 따라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에 총73,556가구에 236,877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4). 나주 장 씨(羅州 張 氏)
시조 장세동(張 世 東)은 장 정필의 후손인 장유의 22세손이며 부호군 을 지낸 장 호 채 의 둘째 아들이다.장세동 은 조선(朝鮮)이조(李朝)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나주(羅州)에서 살다가 황해도(黃海道)장연으로 이사 하였는데 고향인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에 총1,170가구에 3,662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5). 나주(羅州)정 씨(鄭 氏)
시조는 고려 17대왕 인종(仁宗)무렵의 인물로 휘(諱)는 해(諧: 追封 軍器監 判事)는 고려 때 벼슬을 했고 군기감에 추증(追增)되었다. 그 후 후손들은 나주에 정착 세거 하면서 호족을 이루어 해(諧)를 1세로 하고 본관을 나주 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始祖)정해(鄭 諧),의 증손자(4세)설재(雪齎)정가신(鄭可臣:1224~1298년)은 왕이 친히 내린 이름이며 자는 헌지(獻 之),아호는 설재(雪 齋),시호는 문정(文 靖)이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향공(鄕貢)진사(進士) 정 송수(鄭 松 壽)의 아들로 고려 고종 11년(1224년)갑신년에 태어나 노안면 금안리(金鞍里)에서 자랐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 琪)를 따라 상경(上京)하여 1255년(고려 고종 42년)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 3년(1277년) 보문 각 대제(寶 文 閣 待制)가 되고 정녕 공(貞 寧 公)에 봉해졌다. 이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를 거처 비서 윤(秘書 尹)으로 필적이 되고 1280년(충렬왕6년)승지(承旨)가 되었다. 1284년(충렬왕10년)밀직사(密直司)로서 정조 사(正朝 士)가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1287년 감찰대부(監察大夫),판삼사사(判 三司 使)를 역임 후 1290년(고려 충렬왕 16년)정당 문학(政堂 文學)을 거쳐 첨의중찬 판 전리사사(僉議中贊 判 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가 되었으며 세자를 따라 재차 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 절사(聖 節 使)로서 3차례나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의(僉議)시랑(侍郞)찬성(贊成)사, 세자(世子)이사(貳 師)가 되었으며 그 후 벼슬이 여러 번 승배(陞拜) 되었는데 그는 명(名)문장가(文章家)로 서 “천추(千秋)금경 록”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청렴 결백 하였다.졸(卒)후에는 충선 왕묘(忠宣 王廟)에 배향되고 나주의 설재서원(雪齋書院)과 함평의 오산 사(鰲山 祠)와 세덕 사(世德 祠)에 모시였다. 삼불의 헌공(三 不 義 軒 公)정초(鄭 初:1344~14236년)는 정가신의 증손으로 태종(5년,1405년) 문과 에 급제 하여 집현전 교리, 호조 판서 을 지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가신의 5세손 정식(鄭軾:1407~1467년)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 하였고 함길도 도 관찰사(都 觀察使)로 야인 정벌(野人 征 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自 憲 大夫)로 지중추부사(知 中 樞 府 事) 에 이르렀다.
그 밖의 인물로는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정국(鄭 菊)과 이조 정랑(李朝 正 郞)을 지낸 정 일 헌(鄭 逸 軒)과 정심(鄭 諶:1520~1602년)부사(府使)를 역임한 정상(鄭 詳:1533~1609년)등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으로 일컬어진 정 여린(鄭 如 麟:1564~1640년)이 뛰어났다. 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 부호군(龍 懩 衛 副 護軍)을 지낸 정 기수 (鄭 麒 壽)와 수군방어사를 지낸 정봉수(鄭鳳壽),병조(兵曹)참판(參判)에 추증된 정 응(鄭 應),죽 우당(竹 友 堂)정란(鄭 瀾:1583~1656년),묵 재 공(黙 齋 公)정 눌(鄭 訥)등이 가문을 대표 하는 후손 들이다.
나주정씨(羅州 鄭氏)는 본관이 나주이나 처음 족보인 을유보(乙酉 譜)와 신해보(辛亥譜)에는 인산(麟山)으로 되어있다. 대부분이 본관을 나주로 쓰고 있으나 아직도 본관을 금성(錦城)으로 쓰고 있는 종친이 있는데 이는 나주의 고호(古號)가 금성(錦城)이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지만 지금현실은 관향(貫鄕)을 통일함이 절실하다. 이는 하동정씨(河東鄭氏) 에서 분적 한 금성정씨(錦 城 鄭 氏)가 따로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재 서원(雪 齋 書院):전남도 지정 문화재 93호로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 평리 649에 있다. 설재 정가신을 배향하기 위하여 숙종14년(1688년)나주시 노안면 금안 동에 최초로 창건되어 현재는 9위를 향사 하고 있다.
숙종19년(1693년)설재 선생의 5세손으로 세종 때 효자정려를 받은 경무 공 영모 정, 정식(鄭軾),이 추배(趨拜)되었다. 숙종38년(1712년)여름에는 향사우로 승격되어 설재 서원(雪 齋 書院)이 되었다. 경종3년(1723년)노안면 금안 동에서 영 평리 영안 마을로 이건하여 강당인 영 모재(靈 茅 齋)를 건립 하였고 암헌(岩 軒)신장(申檣:1381~1433년)후손인 정심(鄭 諶)을 추배 하여 4위가 배향 되었다. 고종5년(1868년)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 되었다가 1900년 영모 재를 복원하여 제향(祭香)하다가 1953년 서원을 복설 하면서 이때 창 주공(滄 洲 公),정상(鄭 詳),정 여린(鄭 如 鱗),정란(鄭 瀾)을 추배하고 1988년 삼불 의 헌공(三 不 義 軒 公),정초(鄭 初),묵재 공(墨 齋 公) 정 눌(鄭 訥)등이 추배 되었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羅州 鄭氏는 남한에 총29,868가구에 93,845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6). 금성 정씨 (錦城鄭氏)
하동정씨(河東鄭 氏)도정(道正)을 시조(始祖)로 하는 7세손(世孫) 정성(鄭 盛)은 1314년(고려 숙종 왕1년)문과에 급제 하여 대광(大 匡)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금성 군(錦城君 :羅州의별호)에 봉해져 이거 하였으므로 하동 정씨(河東 鄭氏)에서 분관(分貫)하여 본관을 금성(錦 城)정씨로 사용한 정확한 기록은 서술 할수 없으나 1700여년 무렵 종중의 합의에 의하여 도정(道正)을 시조(始祖)로 하는 하동정씨(河東 鄭氏)로 합본(合本) 통용(通用)하고 있으나 그 후 9세 정지(鄭地:1347~1391)를 경렬공 파조(景烈公派租)로 하는 경렬공파의 5세조이며 차자감찰공인 확(穫)의 후손 사형제(四兄弟)중 네째 자손 정읍 고부(古阜)문중의 현감 공 충종(忠宗)후손 중 첫째. 셋째, 넷째 손은 하동정씨 경렬공파로 환원되었고 본관을 금성(錦 城) 정씨로 주장해 지속해오는 둘째 하동정씨 14세손이며 금성군 성(盛)선조(先祖)에서 分本된 금성정씨(錦城鄭氏) 를 그대로 이어 오고 있는 조선중기의 충무공 정충신 금남군(錦南君)의 후손 들 은 충남 서산시 지곡면, 당진군 대호지면, 전북익산시 춘포면 오산리, 전북 장수군 장계면과 남원시에 주로 집성촌이 있으며 전북 고창군과 전남 장성군 과 남면 월곡, 담양군, 경남 함양 등 일원 에 는 극히 일부 후손만이 씨족사 에 기술하는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금성정씨(錦城鄭氏) 세계 를 이어오고 있는 후손들 뿐 이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河東鄭氏 7世祖 성(盛:錦城君)에서 금성정씨 를 그대로 이어 오고 있는 윤(倫:地의 八世孫)은 판중추부사(判中樞 府事)에 증직(贈職)되고 윤(倫)의 아들 충신(忠信)은 1623년(인조1년)안주(安州)목사(牧使)로 방어사(防禦 使)를 겸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자 전(前)부대장(部隊長)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으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대도호부사(大都護 府使)를 지낸 훌륭한 분이다. 뿐만이 아니라 천문(天文) 지리(地理)의술 등에 능통 했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호군(部 護軍)을 지낸 정 우직(鄭 友直),정 우현(鄭 友賢),정 태석(鄭 泰 石),정 상로(鄭 相老),등과 공조 참의(工曹 參議)를 지낸 정기홍(鄭 基鴻),이 유명 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낸 정 재실(鄭 在實)과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한 정 광로(鄭 光老)가 가문을 빛냈다. 2000년도 인구 조사에 의 하면 금성 정씨로 2,112가구에 총 6,782명 이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그러나 하동정씨(6세: 좌윤공)난연”이하손이 도정을 시조로 하는 하동 정씨로 환본되어 정리되는 정황을 파악하지 못하여 2000년의 인구조사에는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이 금성 정씨로 그리고 가구 수와 인구가 많게 조사 기록 되어 있음을 밝히고 싶으며 모두에서 언급 한바와 같이 일부의 자손 만이금성정씨 의 대(代) 를 이어 오고 있음니다.
(17). 나주(羅州)정씨(丁 氏)
시조(始祖)정 윤종(丁 允 宗)은 고려 시대에 검교(檢校)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나주 정씨는 숙종과 경종 때 까지는 본관을 압해로 써오다가 압해가 나주로 속하게 되자 본관을 나주(羅州)로 고치게 되었다. 그런대 최근에 와서는 압해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인식이 새롭게 대두되어 더러는 압해정씨 또는 나주압해정씨 등으로 혼용하고 있다. 나주 정씨 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본관을 나주(羅州)정씨(丁 氏)로 쓰고 있다.
한편 중국 당나라에서 대양 군에 봉군 되어 승상(丞相)을 역임하다 압해도에 정착한 정 덕성(丁 德 盛)을 시조로 한 압해 정씨가 존재하며1762(영조 38)∼1836(헌종 2)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정조14년(1790년)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인공도시 수원과 화성에 수원성을 축조 할 때 정조의 명을 받아 기중도설(起重圖說)등의 글을남기고 우리나라 최초로 기중기를 이용한 성을 쌓은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과 그의 웃 형제인 정약현(丁若鉉),정약전(丁若銓),우리나라 최초로 언문으로 천주교요지(天主敎要旨)를 만든 정약종(丁若鍾)이 유명하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羅州 丁 氏는 남한에 총28,786가구에 82,863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8). 나주(羅州)최씨(崔 氏)
나주 최 씨는 동성동본 이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첫째 계통은 탐진 최 씨 계파의 중조로 조선(朝鮮)세종(世宗)때에 진의 부위(進 義 副尉)에 올랐던 최 정원(崔 井 元)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청 양 파(靑 陽 派)이며 다른 한 계통은 조선 명종(明宗)때 진사(進士)였던 최 택(崔 澤)을 시조(始祖)로 한 가선대부에 오른 최 논 금(崔 論 金)을 1세조로 하는 보령 파(保 寧 派)이다. 그러나 탐진 최 씨 세보에 의하면 최 정원은 탐진 최 씨 강진파의 중조인 최 준량(崔 浚 良)계에 합보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나주최씨 세보에는 정원의 손자 금 남공(錦 南 公)부(膚)가 나주 출신으로 후손들이 충남 보령과 청양 등지에 세거하면서 금 남공 출신지인 나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한편 한국(韓國)성씨(姓氏)총감(摠監) 탐 진 최 씨 조에는 최 부 는 탐진 최씨 13세손으로 금남파의 중조라고 기록 되어 있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羅州 崔 氏는 남한에 총1,922가구에6,018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 이외에도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 중 1,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성씨는 /나주(羅州)강씨(姜 氏)가 1,336가구에 3,935명 /羅州 노씨(盧 氏)가 600가구에 1,832명/羅州 文 氏가 765가구에 2,537명/남 평 반 씨(潘 氏)가 676가구에 2,227명/ 羅州배씨(裵 氏)가 1,177가구에 3,789명/ 금성(錦 城) 배씨(裵 氏)가 377가구에 1,146명/ 나주(羅州)백씨(白 氏)가 506가구에 1,536명/ 나주(羅州)서씨(徐 氏)가 831가구에 2,617명/나주(羅州)성씨(成 氏)가 537가구에 1,698명/ 나주(羅州)손씨(孫 氏)513가구에 1,657명/나주(羅州)송씨(宋 氏)가 1,247가구에 4,014명/나주(羅州)신씨(申 氏)가 683가구에 2,148명/나주(羅州)엄씨(嚴 氏)가 546가구에 1,690명/ 나주(羅州)염 씨(鹽 氏)가 564가구에 1,830명/ 나주(羅州)유 씨(柳 氏)353가구에 1,153명/ 남 평(南 平) 윤씨(尹 氏)가 338가구에 1,076명/ 나주(羅州)전씨(全 氏)가 1,629가구에 5,167명/나주(羅州)조씨(趙 氏)가 1,680가구에 5,502명/ 남 평(南 平)조씨(曺 氏)491가구에 1,398명/나주(羅州)주씨(朱 氏)581가구에 1,931명/ 나주(羅州)차씨(車 氏)377가구에 377가구에 1,235명/나주(羅州)차씨(車 氏)649가구에 2,103명/나주(羅州)한씨(韓 氏)774가구에 2,572명/나주(羅州)홍씨(洪 氏)895가구에 2,861명/ 나주(羅州)황씨(黃 氏)512가구에 1,579명 등으로 나타나 있다.
☞ ※ . 참고 문헌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정씨 족보(族譜)(본관별)
민족문화(民族文化) 대백과 사전/나주문화연구원 자료 등 다수
김 관봉 의 신구 관혼상제. 황화문화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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