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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nk-ele(봉암)</title>
    <link>https://nk-ele.tistory.com/</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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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Thu, 18 Jun 2026 09:12:1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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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봉암</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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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국 북경 여행기</title>
      <link>https://nk-ele.tistory.com/29</link>
      <description>&lt;P&gt;중국 北京(북경) 여행기 &lt;BR&gt;여행기간 : 한국출발(2009.10.30.15:10무안공항)OZ341편~ &lt;BR&gt;(4박5일) 한국도착(2009.11.13.14:10무안공항)아시아나편 &lt;BR&gt;여행 예정지: 만리장성(케이불카포함)/용경 협/천단공원/이화원/수도박물관/금면 와조/왕 부정 거리/ 천안문 광장/자금성/인력거투어/발 맛 사지/북경서커스/베이징 써커스/천단공원4대특식(음식):샤브샤브/북경오리구이/태가 촌/한식(불고기)평양식당. 등 다양한음식. 등 담당 여행사 :하나투어 최 문호 사장HP:010-3308-5030/한국인송가이드 :정 경희여행 숙박지 : 2008년 북경 올림픽 시 개장한 사 성급 best western olympic hotel geijing호텔주소: 중국 북경시 조 한구 북소 협대로 갑1호100101 전화:(86)10-6487-4433홈페지 주소:www.bwolympichotelbj.com (홈페지 접속공시숙박료 9022호 기준 1박 약21만원임)&lt;BR&gt;여행 첫 재날 09.10.30일 (금요일)북경도착/비 &lt;BR&gt;덩그마니 외롭게 서있는 무안 국제공항의 관제탑이 보이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새롭게 뚫려 개통하여 2년여쯤 되어가는 광주-무안 공항 간 4차선 고속도로를 달려 50여분이 다되어 가는 시간 이였고 5년여에 걸처 완공 계통한 쭈~욱 뻗은 활주로에 계류되어 있는 비행기는 보이지 않고 오가는 차량 행렬도 뜸하며 몇 십대의 주차된 차량에 남아있는 텅 빈 주차장이 더욱 초라해 보이는데 2층 승객하차장에 짐과 집사람을 내려주고 청사앞 주차장에 차를 두고 청사내로 들어가는 내게 처음이면서도 마냥 외롭게 느껴지는 무안국제공항은 21세기 서남부 지역의 국제관문으로서 인천국제공항·김해국제공항과 함께 항공교통망의 삼각 축을 형성하기 위하여 건설된 공항이다. 1999년 착공하여 2007년 11월에 개항하였다. 국내선은 제주·김포 노선을 하루 4편씩 운행하고, 국제선은 중국과 타이 페이 노선을 중심으로 운항된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하여 무안공항과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도 건설된다. 시설 부지는 총 256만 7000㎡이다. 활주로는 길이 2800m, 너비 45m로 대형 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다. 9만 1000㎡의 계류장에는 비행기 9대를 수용할 수 있다. 여객터미널은 연면적 2만 9100㎡로 국내 여객 100만 명과 국제 여객 416만 명 등 연간 51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화물터미널에서는 연간 5만t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다. 주차장 면적은 6만 6990㎡로 한꺼번에 2095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곳 이란다. &lt;BR&gt;한때는 개항의 가속도를 따라 인천공항 상해 국제선등 몇 편의 노선이 있었지만 설상가상경기 침체와 신종 풀로 의 세계적인 영향 탓으로 휴항했든 국제노선인 무안- 북경 간의 일주일에 화. 금요일 에 엊그제부터 운항하는 여행 일정에 우리 일행도 다소는 걱정 반 두려움 속에 친구들과 어울려진 회갑 여행의 일정이고 내게는 봄철의 정도 회 태국 회갑 여행에 이여 두 번째 나가는 무안 직항의 북경을 선택한 여행 이란다.넓 직한 청사 내에 여유롭게 업무하는 공항 청사 직원들 과 입국 을 환영 나온 환영객 그리고 13시30분 까지 도착 하는 북경 행 여행객들 몇 사람이 있고 그중에 우리일행 철수 내외와 관 배 내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합류된 우리는 출국에 들떠있는 것이지만 마냥 한가로움은 무안 공항의 분위기에 편승 되였단다. &lt;BR&gt;최신식 공법 최신식 설계에 의해 최근에 완공되어 개항된 무안국제공항 최근 들어 지역 광주 공항에 국제선을 유치 하겟 다고 나서는 광주의 여행관련 업체들의 목소리에 상생의 발전이 문어 지지 않는지 아쉬울 뿐이다. &lt;BR&gt;&lt;BR&gt;&lt;BR&gt;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도 흐르는 시간에는 멈출 수 없기에 200석 규모의 색동 아시아나항공 C-341 여객기에 탑승한 시각 14시40여분 모두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와 탑승 시 유의 사항을 영어와 우리말로 안내 한 후 동체는 서서히 2번 게이트를 빠저 나와 좌측으로 턴을 하고 다 씨 한번 좌석벨트를 메어달라고 안내방송이 나가드니 이어 굉음의 엔진소리가 높아지며 기체는 서서히 이륙을 시작 한다. &lt;BR&gt;&lt;BR&gt;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무안반도의 바닷가와 육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창밖에서 밀려들어오는 햇볕이 앞사람 의자의 등받이를 휘 감고 돌아가는 시간 벌써 들판이 바둑판처럼 산과 들의 그림 을 남긴다. 채5분이 지나지 않아 벌써 눈에 익은 나주시가 강을 끼고 펼처 지고 잠시 후 구름사이로 헤 짚고 들어서니 어느덧 고도 일만 feed를 안내하는 모니터안내판에 눈이 돌려지고 분주하게 기내를 오가는 스트듀어 아가씨들이 기내식사 배급하기에 여념이 없다. &lt;BR&gt;얼마를 지났을까 모니터 안내판에는 베이징 공항 페이킹(Peking)공항'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중국 수도 뻬이징(북경)의 대표 공항으로 뻬이징&amp;nbsp;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 위치 이다. &lt;BR&gt;[참고] '페이킹(Peking)' 이라는 명칭은 1958년 중국 정부가 새로운 영문표기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사용하던 중국 영문 표기 방법이다.&amp;nbsp; Beijing 이라는 중국 정부 영문 표기법은&amp;nbsp;1982년 국제표준위원회가 중국 주장을 인정하면서부터 국제적으로 공식 사용되기 시작했다.&amp;nbsp; 하지만 예전부터 사용하던 국가 기관이나 지형물 등에 대한 영문 명칭은 그대로 예전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amp;nbsp; 그래서&amp;nbsp;북경대학을 Peking Uni. 라고 부르며, 북경공항을 Peking Airport, IATA 공항 코드로 PEK 를 사용하고 있다. 지난 10년 간 항공 교통량의 급증으로 인해 2009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바쁜(큰) 공항 중 3번째를 차지하기도 했을 정도로 급성장해 2009년엔 65,329,851 명이 이용했다.&amp;nbsp; 항공기 이착륙 횟수만으로 보면 세계에서 10위권에 해당한다. 중국국제항공(Air China, CA), 중국남방항공(China Southern Airlines), 해남항공(Hainan Airlines) 등이 자신들의 허브공항으로 삼고 있는 공항이다. 급속하게 증가한 뻬이징 공항의 항공 교통량과 이곳 영공을 지나는 유럽행 항공편 등으로 인해 극심한 항공교통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어. 지연율 5위권 안에 드는 공항으로도 유명하다. &lt;BR&gt;도착 전 현지시각 16시 05분 (한국시간 17시 05분)구름 위를 나르던 비행기도 고도를 낮추어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도시 북경의 시내가 바둑판처럼 선을 그어놓은 도로 따라 대체로 잘 정돈된 2008년 올림픽을 유치한 도시(베이징)북경이란다. 착륙한 비행기의 게이트를 따라 한참을 걷고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수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그것도 부족해서 공항 버스대신 전철 같은 괴도 열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하는 것은 거대한 大國 中國의 국제공항 청사의 면모를 말하기에는 충분했다. 입국수속의 절차는 착륙 후 50여분이 다되어 금번 하나투어에 일행 이 될 여행객들과 안내로 함께한 정이사의 안내로 알게 되었고 얼마 후 각자 여행 가방을 찾고서 이동하니 키가 작달막한 반 스포츠머리 타입의 현지 가이드를 만나 대기하고 있는 28인승 중형 관광버스에 탑승 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을 늦게 찾아 모두가 탑승한 우리 여행객 이 21명임을 확인하고 버스가 출발하려니 다소는 어둠이 오는 현지시간 17시 40분이였다. 마이크를 잡은 유창한 한국말 씨의 현지가이드의 본인소개는 중국의 하얼빈이 고향이고 16년의 일본 가이드를 거처 자국민을 상대로 한국 가이드 1년 반을 했다는 금년나이 28세 “손 광걸 ”씨란다. &lt;BR&gt;&lt;BR&gt;전 세계적으로 4번째 크다는 북경은 168만평에 14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지금 세계의 인구는 60억 그중 560만m2의 거대 중국에 호적에 오른 인구가 13억이며 일인 1명 낳기의 호적법에 따라 호적에 오르지 않는 인구까지 합하면 세계인구 4/1인 15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단다. 북경의 관광은 걸어서 하는 관광 이라 하여 “발광”이라고도 하며 새벽 에 나갔다 저녘 늦게 돌아오는 피곤한 관광이며 북경은 대체로 건조한 날씨가 많아 장마철 서울에 하루 내리는 비가 북경의 1년 강수량에 해당되어 오늘처럼 비가 오는 관광의 날씨는 거의 만날 수가 없으나 이렇게 비가 오면 당장은 불편하나 비가 그치는 내일은 북경에 흔히 있는 황사가 없어 좋으리라 생각 되어 오늘 이곳에오신 여러분은 행복한 여행이 될 것이 다는 것이란다. &lt;BR&gt;&lt;BR&gt;또한 중국에는 이동거리가 코앞 이라면 50분~한 시간을 두고 말하는 넓은 의미의 뜻이고 이곳 북경은 원래 북경이 아니고 역사책에는 연경”이라 했고 아시아에 4경은“북경”“남경(원나라)”일본에“동경“한국의 평양과 서울사이에 개경(개성)”서경“이라 한다며 북경을 또한 beajing(베이징) 이라 고도하여 2008년 이곳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베이징 올림픽 이라 했단다. 자칭 우리를 안내 하게 되어 행운을 갖은 것이라며 또한 단체 비자국인 우리에게 한사람이라도 여권 을 잃으면 전체가 귀국 할 수 없다는 여권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강수량이 적어 물이 좋지 않음으로 생수 또한 가짜가 많음을 알려주며 한국 돈 일천 원에 생수 2병을 주는 기사가 파는 생수를 권하는 재치를 보이기도 한다. 어둠의 차창 밖으로 가로등 불빛을 따라 40여분 달려 우리가 처음으로 안내된 곳은 세계최고 수준 과 화려한 무대 매너와 함께 단원들의 신기한 묘기와 체조들이 어울려진 북경서커스(天地 서커스) 의 공연을 보고나니 현지시간 밤 10시 30분 관람지에서 10여분 떨어진 곳에 안내된 곳은 독특한 양념과 바삭 바삭한 껍질의 맛이 일품인“북경 오리구이”로 늦은 저녁을 끝내고 20여분 달려 이동하여 앞으로 4박을 투숙할 best western olympic hotel(아태 국제 주점 :4성급 호텔) 에 안내되어 로비에서 가이드가 배정해준 9022호의 room에 들어가 첫날의 여장을 푸는 현지시각 밤 11시 17분이였다. &lt;BR&gt;&lt;BR&gt;“ 북경 서커스 공연장 전경” &lt;BR&gt;여행 둘째 날 10월31일 (토요일)비/흐림 &lt;BR&gt;우리의 모닝 콜 시간은 새벽 5시30분 호텔 밖 차도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통행 소리가 새벽잠 을 설치게 하는 북경의 새벽 우리 부부는 모닝콜에 개의치 않고 샤워를 하고 세면을 하고6시부터 시작 되는 호텔 식 조 식탁 의자에 자리를 했고 조금은 숙달된 호텔 현지 식에 만족하고 이 호텔을 계속 이용 계획으로7시부터 시작 될 여행에 가벼운 차림으로 우리를 기다린25인승 버스에 탑승 하루 여행을 시작 한다.우리 일행을 태운 차량은 북경 시내에서 외각으로 달리는 중에 오늘 첫 코스 에 시작될 만리장성 에 대한 소개를 가이드는 시작 한다. &lt;BR&gt;만리장성(萬里長城)은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에 이른다.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峪關]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보통 만리장성의 기원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로 잡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 770~ BC 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통일 왕국인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한 것이다. 당시의 만리장성은 동쪽 랴오양[遼陽]에서 서쪽 간쑤성 성[甘肅省] 민현[岷縣]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lt;BR&gt;만리장성이 현 위치 에 처음 축성된 것은 6세기 북제(北齊) 시대이다. 처음 건축될 무렵의 길이는 산시성[山西省] 리스 현부터 보하이만[渤海灣]까지 약 1,500㎞였다. 이후 명(明)나라 때 총 길이 2,700㎞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나라는 15세기~16세기에 만리장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는데, 당시 북방에 있던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amp;nbsp;청(淸) 왕조에서는 군사적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때 관광 목적으로 보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만리장성 2,700㎞가 똑같은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중으로 축성된 곳도 있고, 성벽의 높이나 폭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서쪽보다는 동쪽이 견고하게 축성되어 있다. 성을 쌓은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 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塼), 그리고 돌 등인데 동쪽으로 갈수록 더 단단한 재료를 사용했다. 성벽은 높이 6∼9m, 평균 폭은 위쪽 4.5m, 아래쪽 9m이다. 100여 m 간격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을 쌓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amp;nbsp;따라서 왕조의 성격에 따라 만리장성의 중요성이나 만리장성에 쏟는 정성도 달라졌다. 왕조가 공격적이었던 시기보다는 방어적이었던 시대에 만리장성은 더욱 중시되었다. 북방 경영에 열심이었던 당나라 때나 전 세계를 무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던 몽고제국과 뒤이은 원나라, 만주에서 일어나서 만리장성 너머까지 다스렸던 청나라 때는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지고, 따라서 개보수 작업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만리장성은 군사적인 역할 이외에 문화적으로는 유목 문화 와 농경문화,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에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서 방어 벽 으로서 역할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관계없이 오늘날 만리장성은 중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lt;BR&gt;&lt;BR&gt;중국어‘Wanlichangcheng이나 우리의 한자음으로 그 옛날 한 개의 나라가 아니고 7개의 나라가 서로 가 성을 쌓아 만든 성으로 이성을 밤낮 없이3개월 20일 걸려 돌아본 사람은 이 세계에 단두사람 뿐 이 었단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변경 방위를 목적으로 쌓은 긴 성벽으로 전국 시대 조(趙)나라, 연(燕)나라 등이 쌓은 것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흉노의 침략에 대비하여 크게 증축하고 이 이름으로 불렀다. 이후 청나라 때에 오면 군사적인 의 이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만주, 몽고를 구분 짓는 정치적, 행정적인 경계선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길이 약 2,400킬로미터로, 서쪽 자위관(嘉峪關)에서 동쪽 산하이 관(山海關)에 달한다.[萬里長城]’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말이다. &lt;BR&gt;또한 이 만리장성을 중국의 큰 무덤 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벽돌 한개 을 쌓는데 사람 한명이 죽었다고 하여 있는 전설로 이성을 쌓는 데는 그 옛날 명나라와 청나라가 있었는데 말을 잘 타고 잘 싸우는 몽골족 이 제일 무서워 몽골족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오늘 우리가 여행하는 위치는“소영광”성으로 가장 가파른 성이란다. &lt;BR&gt;“수관장성”과 “팔달영” 만리장성을 케이블카를 타는 관광지로 400m는 자동차로 600m는 케이블 &lt;BR&gt;카로 200m는 걸어서 하는 관광 코스라고 소개한다. &lt;BR&gt;차가운 칼바람이 말리장성의 성벽을 따라 몸을 감고 돌지만 다시 오기 힘든 이국의 여행이기에 높은 성벽을 역사의 기행으로 상기하며 수만은 인파를 헤집고 시간의 나래를 편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222B584751B4311D2A&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exif=&quot;{}&quot; actualwidth=&quot;950&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950&quot;  id=&quot;A_222B584751B4311D2AD5A9&quot;/&gt;&lt;/P&gt;
&lt;P&gt;&lt;BR&gt;만리장성을 관람하고 다음코스 용경협 으로 이동하는 차내에서는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 옛날 중국과 韓國의 경제의 차이는 10년이 앞서가는 대국 이였는데 사회주의 경제를 표방하는 中國이 오늘날 오히려 중국이 10년이 뒤졌는데 지금은 어느 학자도 中國과 한국이 누가 앞 섯 다고 말을 못한단다. &lt;BR&gt;그래서 中國에서는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말을 못하고 개혁 개방이라 부르짖는데 中國에서는 자본주의 하면 자기네끼리(특수층만)잘 먹고 잘 산다 고 여론은 높았으나 자본주의 정책으로 선포함에 따라 中國에서는 데모를 하면 사형시키는 제도가 있었으나 1989년 6월4일 천안문 광장에 150 만 명이 모여 시위를 하여 그때 정부에서는 군경 병력을 천안문 외곽에 포위를 하고 시위하는 군중을 탱크로 깔려 죽이고 죽은 인파는 곧바로 뒤따른 포크린 이 덤프차에 실어 화장해 버리고 대다수 中國인이 알 수 없도록 그 데모가 있는 그 이튼 날 그 많은 인파를 죽였어도 피한방울 볼 수 없이 치워버린 무서운 나라 였 다고 가이드는 설명 한다. &lt;BR&gt;그러나 그 사태 이후 날로 경제가 발전하고 잘사는 나라로 변하자 지금은 자본주의 나라 의생활의 마인드가 변하지 않고 대외 변화가 없었으나 中國에는 중상층이 거의 없고 많은 부자와 많은 가난한 층이 주류를 이룬단다. &lt;BR&gt;中國에서는 국적을 갖고 있으면 땅을 분배해주는데 그 땅을 놀리면 불법이며 임대를 해주든지 아니면 그 땅을 이용을 해야 한단다. 지금 여러분이 여행 하시는 동안 주위에 보이는 산야에 큰 나무를 볼 수가 없는데 큰 나무가 있으면 적군의 음 패가용이 하므로 그때 정책상 전부 베어 버렸는데 결국 황폐 하고 강수량이 적어 눈에 보이듯 큰 나무가 없다고 한다. 등소평 은 죽기 전에 소원이 있었는데 그의 첫 번째가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날려달라는 것과 그 또한 홍콩의 도시를 中國소유로 만들고 한 발짝 딛어 보는 것이 소원 이였는데 1997년 7월 1일 홍콩을 계약할 예정 이였는데 1997년 6월 말에 계약을 하지 못 한체 유명을 달리 하였단다. &lt;BR&gt;&lt;BR&gt;그래서 그 무렵 이곳 중국에도 많은 무덤이 있었으나 등소평의 정책으로 땅도 많고 인구도 많고 자원도 많았으나 필요 없는 땅이 많다 하여 모두 밀어버렸고 그후 사람이 죽으면 화장 을 해서 날리라 하여 지금은 묘지를 볼 수가 없는 중국이 되었단다. 그러니까 등소평이 서거 했을 당시 중국의“모택동“북한의 ”김일성“베트남의 ”호치민“러시아의 ”레닌“이 유리관에 안치되었는데 그때당시 국민들은 ”등소평“의 시신을 유리관에 안치하고 모택동의 시신을 화장해야 한다고 여론이 높았으나 유언 이였기에 결국 ”등소평“의 시신을 화장해 날려 그때부터 화장해서 날리는 화장 문화가 중국에는 정착되었단다. 한참의 설명이 있고나니 어느덧 목적지“용경협”에 도착이 임박해 간다며 용경 협은 1973년에 계곡을 막아 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 호수(저수지)로, 1996년 댐 위에까지 올라가는 용 에스컬레이터가 생기면서 베이징의 16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lt;BR&gt;7㎞를 운행하는 유람선이 특히 유명한데, 유람선을 타고 주위 절경을 감상하는 데 총 8시간 정도 걸린다. 협곡의 좌우로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이 잇따라 펼쳐져 장관을 이루는 까닭에 일명 작은 구이린[小桂林], 작은 싼샤[小三峽]로 불린 단다 &lt;BR&gt;협곡에서 산을 보면 장가계 산을 대신하고 물을 보면 계림의 물보다 맑다는 땜의 높이 800m로 축조 되었으며 땜을 가기 위해 만든 세계에서 제일 긴 에스컬레이터를 이용 용(龍)의 입에서 타고 들어가 용의 꼬리에서 나오면 땜에 도착하며 배를 40 분타고 관광하는 금번 여행에 가장 기대되는 코스라고 설명한다. &lt;BR&gt;&lt;BR&gt;&lt;BR&gt;용의꼬리 를 나와 조금 오르니 협곡의 양쪽을 이어주는 수십 기의 2인승 에스컬레이터가 협곡 위를 가로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운행을 제한하고 있는지 그대로 멈추어있고 아래쪽 선착장에는 포장을 지붕 삼고 나무로 설치된 다닥다닥 이 붙은 정비된 의자 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밀리지 않은 탓으로 도착 하는 대로 우리일행과 또 다른 여행객이 자리를 하고 나니 동력선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절벽으로 굽이쳐 있는 강을 따라 유람을 시작 한다.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절벽들로 둘러싸여 배를 타고 흘러가니 와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가 막힌 절경을 보여주고 싶단 생각만 들더라고요. 하지만 사진을 아무리 찍어도 동영상을 아무리 찍어도 본연의 웅장함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는 게 안타 까 웠 어요. 물은 푸르다 못해 검푸른 색을 띠며 넓은 곳이래야 폭이 100여m 내의 길고긴 유람길 절경과 풍경이 역시 기대이상의 환상 속에 가든 뱃길을 다시 돌아오는데 강위에 아슬아슬한 번지 점프와 절경 을 보며 약 40여분이 소요 되었다 우리 일행이 다시 주차장의 차량에 탑승한 시각 오후 2시20분이다. 처음엔 우 아아!- 하던 멋진 장관도30분 정도 같은 장면만 보니 그저 춥더라는 생각이 절경의 우아함에 잊은 채 버스에 오르니 용경협 에 도착 전에 못다 한 이야기라도 있는 듯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는 다시중국 국민은 中國에서 태어났지만 대다수 세 가지 소원을 말한단다. &lt;BR&gt;&lt;BR&gt;첫째 자기나라 음식 전부를 단한번씩이라도 먹어 보는 것과 둘째는 자기나라 문자를 다 알고 읽어보는 것이 소원이란다. 中國에 문자를 다 합치면 팔 만자 가 넘는데 中國에 저명한 국문학자도 2만자 정도 밖에 알지 못 한다 는 것이다. 세 번째는 수도 북경을 가보는 것이 대다수 소원인데 15억 인구 중 절반에 가 차운 인구가 아직 북경 구경을 못한 형편이란다. &lt;BR&gt;&lt;BR&gt;지금우리가 가는 곳은 명나라 황제 13분이 모셔 저 있는 명 십삼능(明十三陵)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명십삼능(明十三陵)은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약50 km 지점 인 창핑(昌平)현 텐서우(天壽)천수 산기슭에 위치한다. 명(明)나라 13명의 황제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제 13대 영락황재를 필두로 황제 13인과 황후23인의 무덤군 으로 함께 매장된 비빈과 궁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조차 어렵단다. 또한 거대한 묘역 안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태자와 공주들의 묘도 함께 포함되어 있어 말 그대로 명나라의 황실 전용 묘 인 샘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독특하게 생긴 나무들이 명찰을 단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명나라 선조의 장릉(長陵)이 명(明)영락7년(1409년)에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에 11개 릉이 장릉(長陵)의 양옆으로 세워 졌으며 명 송정 재 주유검(朱由檢)의 사릉(思陵)이 마지막 릉 인데 청(靑)순치(順治)원년(1644년)에 정릉(定陵)이라고 칭해지고 땅위에 건축도 하였다. &lt;BR&gt;&lt;BR&gt;소위 지하 궁전이라고 불리는 명 14대 황재 신종의 묘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벽틈에 자라나는 나무가 지금까지의 세월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신기하기만 하 였다. 지하 궁전으로 들어가니 명말(明末)과 청초(靑初)시기의 수많은 전쟁들과 그 이후의 끓임없는 침략으로 인해 훼손 되었으나 청건릉(靑乾陵)50~52년(1785~1787년)에 비교적 큰 복구공사가 진행되어 현재는 장(長)정(定)소(昭)릉 세 곳과 신도(神道)네 곳만이 대외에 개방 되고 있단다. 그중에서도 정릉(定陵)지하궁전은 1956년 에 최초로 발굴한 황재 능묘(陵墓)이다. 지하궁전의 높이는 27m 면적 1,195km2의완전한 석조 구조로 견고 하고 장엄 하다. 이곳 역시도 미신을 부르는 릉비에 중국인들이 던진 화폐가 널려있음은 한국과 크게 다른바 없음을 느끼며 지하궁전이라서 그런지 옥좌 옆에 불을 밝히는 촟 대와 항아리가 함께 놓여 있으나 그 깊이는 알 수가 없다. 그 안쪽에는 지하궁전에서 출토된 유품 들을 모셔 놓은 붉은 색의로 단장된 목재 함이 열쇄 통이 잠긴 채 몇 개가 놓여 있다. 지하 궁전에서 지상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며 박물관에 들어서니 명십삼능(明十三陵)을 축소해 놓은 전시관 이였다. 명십삼능(明十三陵)을 모시는 관통 문을 통과할 때 “워콰일레이”라고 외치면 복이 들어온다는 데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지상에 공개된 장릉 은 후손 들이세운 동상 이라며 건물 기둥 또한 썩지 않는다는 녹나무로 원자재 는 126개지만 실제로 밖으로 들춰 받 추어진 수백 년 되어 보이는 수형 좋은 적송(赤松) 과 中國의 국수(國樹)라며 韓國에서 보기 드문 장구한 역사를 눈 여겨 보며 우리 일행은 몇 카트의 기념사진 을 찍는다. &lt;BR&gt;13릉 의 관람을 끝내고 이동한곳은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고 활력을 불어준다는 中國 여행하면 으래 이 빠지지 않는 발 맛 사지 체험에 든다. 요란스럽지 않고 한적한 곳에 위치 한 사업장에는 여행객이 없는 탓에 우리만 기다리는 것만 같은 한적하고 조용한 업소에 즐비하게 누울 수 있는 와상(臥床)의자에 누어발바닥과 종아리에 분포되어있는 반 사구 을 자극하여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노폐물과 독소를 제거하는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체험 이였다. 맛 사지를 하여주는 아가씨 에 따라 흡족도도 달랐지만 대다수 개운한 시간 이였다고 이구동성 토로한다. 다음 의로 이어지는 코스는 북경 시 의 최대의 번화가 왕 부정(王府井)거리로 길 양면으로 백화점과 상점들이 많은데 저녁 이 되어야 개장하는 간식(間食)의 거리가 풍요롭고 이체 롭 다. &lt;BR&gt;저녁 식사를 하고 갔으나 호기심에 찾는 간식거리의 포장마차 에서는 전갈들이 살아서 꼬리를 위협 하는 듯싶은 음식이 있는가 하면 별난 음식을 고루 팔지만 미키한 내 음과 식사 후의 배부름 때문에 가벼운 눈 구경으로 한 시간 의 시간 을 주었지만 40여분 만에 숙소로 돌아가는 차편에 모두가 탑승을 하고 숙소로 돌아간다. &lt;BR&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2478F64D51B430AE0F&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exif=&quot;{}&quot; actualwidth=&quot;950&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950&quot;  id=&quot;A_2478F64D51B430AE0F4236&quot;/&gt;&lt;/P&gt;
&lt;P&gt;&lt;BR&gt;여행 셋 째날 11월 01 일(일요일)첫눈이종일 &lt;BR&gt;버릇처럼 잠자리에서 일어 낫을 때 에는 아직 모닝콜도 울리지 않은 새벽 시간 가벼운 샤워를 하고 조식을 위해 1층 식당으로 가는 시각에야 여명이 밝아져 오고 불빛에 어우려져 창밖으로 눈이 나린 다. 약속된 7시에는 오늘의 여행을 위해 모두가 호텔 옆 뜰에 세워진 차량에 탑승을 했고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는 오늘 여러분은 축복을 받은 분들이라고 했다. 이곳 中國에 11뤌1일 눈이 오는 때는 이래 적 이며 또한 첫 눈 이기 때문이란다. 오늘의 첫 코스는 이화원 가는 길에 東南亞나 中國에 유명한 라텍스 전시장(北京 이화원 1호 점:카이저 라텍스)을 안내하여 제품에 익숙한 일행들은 별 관심 밖 이였으나 선물용 몇 개의 베게를 할인하고 흥정하느라 어느덧 10시 20분에야 차량에 탑승할 때 창밖에는 많은 눈이 쌓여 8년째 북경 생활 중 이렇게 많은 눈이 나리기는 손을 꼽을수 있고 첫눈이 이렇게 나리기 또한 처음이란다. &lt;BR&gt;&lt;BR&gt;20여분을 달려 도착한 이화원 은 북경 성 서직문(西直門)에서 서북으로 약 10km에 있다. 금(金)대 이래의 이궁(離宮)으로 본래 호산원(好山園)이라 불렀으나 청 건륭(乾窿) 15년(1750), 청이원 이라 고치고 함풍(咸豊)10년(1860) 원명원(円明園)과 함께 타버렸다. 광서(光緖)14년(1888)에 중건하고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북쪽의 만수산과 남쪽의 곤명호로 이화원은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은 약 3.7km2로서 4분의 3을 수면(水面)이 차지하고 있다. 만수산은 본래 옹산(甕山)이라 하여 명 ∙ 홍치(弘治) 7년(1494) 나씨(羅氏)가 산의 남쪽에 원정사(円靜寺)를 세웠으나 건륭 15년에 효성태후가 60세를 기념하여 개건(改建),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라고 고쳐 산 이름을 만수산이라 한다. 또 남쪽의 곤명 호는 본래 서호(西湖), 속칭을 태박호(太泊湖)라 하였으나 건륭 15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동부에 있는 동궁 문을 들어가면 건륭시대의 근정전(動政殿)이 자리 잡았던 장소에 인수전(仁壽殿)이 있고, 그 북쪽의 덕화원(德和園)내에 희대(戱台)의 이락전(頣樂殿), 조금 서쪽에 옥란당, 더욱 서쪽에 서태후가 거처하던 낙수 당이 있고 그 당전은 큰 암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낙수당에서 서쪽으로 장랑이 있고 동쪽의 격월문(邀月門)에서 서쪽의 석장정(石丈亭)까지 273간(728m). 석방(石舫)은 장랑 서단의 호반에 있다. 만수산의 중턱에 솟아있는 8각4충전의 불향각은 광서 18년의 재건으로 원래의 원정사 및 대보은연수사의 옛터에 부흥되었다. 이궁(離宮)의 여러 건축의 지붕은 모두가 권붕형(捲棚形)인데 이 일곽(一郭) 만은 대동(大棟, 큰 채 )이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곤명호의 남부에는 섬이 떠있고 백석조(白石造)의 십칠공교(十七孔橋)가 놓여 있어 함허당(涵虛堂), 월파루(月波樓), 감원당(鑑遠堂)으로 갈 수 있다. 또 동북 구석(隅)에는 제취원(諸趣園)의 작은 정원이 있다. 붉은 기둥에 회색지붕의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 화려한 자 희 태후의 침전 인 대형 사합원인”낙 수당“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사람들이 직접 땅을 파서 만든 인공호수와 이곳에서 파낸 흙이 작은 산이 되었는데 그 이름 하여”만수산“이라 불리 우니 서 태 우의 권력을 세삼 느끼며 눈이 비로 변해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낚시를 좋아하는 관 배 친구 왈 이곳에서 낚시나 하며 보내면 하고 !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lt;BR&gt;계속되는 여행은 다음 코스 를 위해 그치지 않는 눈을 맞으며 차량에 탑승한지 20분 베이징의 서부 푸징멘웨이(fuxingmenwai)거리의 공자사원 안에 있는“수도박물관은국립박물관이다. 베이징의 역사 와 생홀상을 엿볼 수 있는&amp;nbsp;장소로, 1981년 공식적으로 개관하였으나&amp;nbsp;2006년 전통적인 미와 현대적 인 건축의 요소를 융합하여 초현대적인 건물을 완성하여&amp;nbsp;재개관하였다. 박물관이 소유한 20만 여점 의 유물을 전시할&amp;nbsp;수 있는 대규모의&amp;nbsp;건물이 필요하다는 베이징&amp;nbsp; 지방 정부의 요구에&amp;nbsp;따라 총 건축 &lt;BR&gt;비12억 3천위엔 을 투자하여&amp;nbsp;총 면적 6,000m², 지하 1층, 지상 6층의 새로운 박물관을 건축하였다. &lt;BR&gt;&lt;BR&gt;구박물관 전시 규모의 10배에 달하는 총 5,622점의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크게 양쪽으로 나뉘는데 오른편은 선사시대&amp;nbsp;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유물, 과거의 베이징 건축물 모형과 자료들, 옛 베이징의 문화 등이 전시되어 있고 ,왼편은 미술, 회화, 서예 등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amp;nbsp;원· 명· 청 왕조의 중심 도시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고 현재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의 역사, 문화 유물과 옛 베이징의 민속양식, 중국공산당의 혁명 역사 등에 관한 것을 다양 하게 전시하고 있다. 또한 중국문화의 전파와 국제적인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amp;nbsp;일본, 미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세계 다른 나라의 다양한 전시물도 전시하고 있다.&amp;nbsp;박물관에는 전싯길 뿐 아니라 모임이나 회의, 세미나&amp;nbsp;등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 홀이 있으며, '박물관의 보물' 과 '베이징의 변천 과정'에 관한 미디어자료를 볼 수 있는 멀티미디어실과 경극을 공연하는 극장이 있다. 또한 도자기 제작,&amp;nbsp;유물 복원과 보존 과정, 먹물 갈기, 경극 분장 등의 체험활동 하는 중국의 학생들을 한참 눈 여겨 본다. 박물관 일층 입구에 는“레닌”을 비 롯“장개석“모택동“등소평”중국을 이끌어온 분들의 사진이 커다랗게 전시된 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각층을 에스컬레이터 로 이동 하고 관람한다. &lt;BR&gt;어느덧 점심때 가되어 하얀 눈을 뒤집어쓴 우리의 관광버스에 탑승하니 20분 만에 간곳은 잉어찜이 독특한 지하일층에 자리한 태가촌 음식이 우리의 배를 불리 운다. &lt;BR&gt;&lt;BR&gt;점심 후 첫 번째 들른 코스는 살림이 울창한 뜰을 들어서니 한쪽의 단청 정각에 때 중이 모여 노래 를 부르고 흥을 돋는 것에 中國에도 이런 풍류가 있나 생각이 든다, &lt;BR&gt;하얗게 첫눈을 뒤집어쓴 나무들 사이로 포장길 따라 둥근 원형 높은 건물이 자한곳 명나라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재를 지내는 곳으로 건물의 가장 중심이 삼중 처마로 된 원형 건축물 中 國 古代 의 천고지 를 바탕 의로 건축된 하늘을 상징하는 뜻의 둥근 원형이며 남쪽은 땅을 상징 하 는 사각형 건물로 되어 있으며 더욱 유명 한 것은 2008년 북경 베이징 올림픽에 성화 봉송을 이곳 에서 체화하기도한 천단공원(天壇公園)으로 황제가 된다는 것은신과 교류한다는 뜻 낱낱이 신께 고 해 바치고 백성의 안위를 약속받는다는 뜻 베이징 황성 내에는 네 개의 제단이 있다. 남쪽의 천단 (天壇), 북쪽의 지단(地壇),동쪽의 일단(日壇),서쪽의 월단(月壇)은 이름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각각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다르다. 이중 천단(天壇)은 가장 중요시되던 제단으로, 명청 시대에 황제가 매 년 이곳에서 천신에게 제를 올렸다. 이곳의 넓이는 무려 자금성의 네 배. 고대규모로는 가장 큰 제 단이라 할만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 최대의 제전이기도 하다. 명나라의 영락제가1420년에 세운 이 제단은 1961년 최초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선포 되었고,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됐다. &lt;BR&gt;건축법의 다양한 활용으로“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천고지저(天高地底-하늘 은 높고 땅은 낮다.)”는 천지의 순리를 담아내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圜丘壇) 정중앙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천심 석(天心石)이 놓여 있는데, 이 천심 석 위에서는 독특한 메아리현상이 발생한 다. 이는 황궁우(皇穹宇)를 둘러싼 회음 벽(回音壁),황궁우 앞에 깔린 세 개의 돌, 삼음 석(三音石)에 도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다. 회음 벽의 이쪽에서 서서 말한 작은 소리는 벽을 따라 전파되어 다른 쪽 벽에서도 들린다고 하고, 삼음석의 경우는 첫 번째 돌에서 손뼉을 치면 한번, 두 번째 돌에서 는 두 번, 세 번째 돌에서는 세 번의 메아리가 들린다고 한다. &lt;BR&gt;&lt;BR&gt;천단의 중심 건축 물 인 기년 전(祈年殿) 천정에는 용과 봉황이 어우러진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바닥에 조각되어 있던 봉황이 밤에 천정의용에게 놀러갔다가 날이 밝자 그대로 눌 러앉은 것이라고도 한 이곳이 天壇 公園 (천단 공원)이란다. 건물의 입구계단 광장에는 많은 눈이 쌓여 계단을 오르기에도 미끄럽고 힘든 상황 이였는데 군복을 입은 인민군들이 어느 결엔가 밀 삽 과 빗자루를 동원 싸인 눈을 치우는 신속함은 사회주의 中國이기에 가능한가싶다. 광장 한쪽에 자리 한 전시장 건물에 들어서니 본관에서 들어 갈수 없고 볼수 없는 유물들을 축소하여 전시 설명되어 한결 이해를 돕기에 충분 했다. 천단 공원 건물 밖을 나오니 中國에 국수(國樹)인 수백 년 된 수 령의 국수 번호의 명찰을 달고 눈 싸인 가지의 자태가 한결 아름다워 기념 촬영을 한다. &lt;BR&gt;오후의 4시가 넘어간 시각 우리를 안내한 버스는 30여분 걸려 도착한곳은 뉴욕의 소호와 같다 하여 베이징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다는 대표적인 예술구로 알려진 “798 다산지 거리” 북경 북쪽 대산 지역에 위치하고 본래는 국영 798 등의 전자 공업지역 이였는데 2002년부터 여러 예술가들과 문화 기구들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빈 공장을 개조하였고 예술가의 아뜨리에, 디자인 회사 ,레스토랑 ,각 테일 바, 등 각종공간의 집합체로 변신하여 국제화 색체, 쇼 식 의 예술 취락 생활방식이 현실 된 곳 이란다.인테리어가 독특한 카페도 많으나 우리 여행객에는 자유분방함 만 가져 올 뿐 주어진 한 시간만 아쉬운 시간 이였다. &lt;BR&gt;11월1일 저녁시간 눈은 멎었으나 차가운 냉기가 가슴을 파고드는데 스케줄에 따라 진행되는 쇼 관람 의 時間 인데 내용보다 스케일로 관광객을 압도하는 전형적인 중국 식 공연 1인당 40 불의 옵션이라면 꾀 부담되는 가격의 관람인데 촬영이 금지 되고 단속반의 감시도 심해 한 컷의 촬영도 하지 못한“금 면 왕조(golden mask dynasty)화교성에서 직접 창작하고 중국에서 거금 을 투자 해 만든 공연작품으로 북경 내 가장 큰 태마파크인 환락 구에서 중국의 최정상급 감독, 편극, 무대, 조명, 음악제작자, 의상제작사, 및 국내의 2,000여명의 우수한 배우들이 함께 심혈을 기울인 예술 작품으로 중국에서 무려 3억 위안 을 투자해 제작한 공연으로 그 내용을 한글자막으로도 내보내며 &lt;BR&gt;그 주요 줄거리는 한 소녀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는 금연왕조 이야기로 전체가 8장으로 구성되어 군대를 이끌고 도망 처 나온 남자 부족인 남면 왕과 여자 부족인 금면 여왕이 전쟁을 치루 게 되고 금면 여왕이 남면 왕을 이기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쟁 후 금면 여왕은 포로가 된 남면 왕과 그 부하들을 위해 축제를 열다가 결국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하늘이 홍수를 내려 금명왕조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고 금면 왕은 스스로 거대한 돌 이 되어 홍수 로 부터 나라를 구하고 금면 여왕을 그리워하는 남면 왕과 백성 들 앞에 금빛 태양 새로 변하여 금면 왕이 나타나고 금면 왕조의 번영을 영원히 지켜준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으며 배우들의 엄청난 연기에도 소름이 끼치기도 하는데 아쉬운 것은 극중 절대 사진 촬영을 통제하고 공연이 끝날 무렵에야 사진을 찍 을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터져 나오는 인파로....!아무튼 북경 여행에 꼭 가볼만한 스케줄이라 생각한다. 쇼 관람을 특전으로 하루 끝을 장식하는 時間이였다. &lt;BR&gt;여행 넷 째 날 11월2일 월요일 맑음 &lt;BR&gt;오늘은 평소 보다 다소 느긋한 7시 30분 탑승한 차량에 이동하여 맑은 날씨 속에 차 거움이 감도는 시내를 한 시간 가깝게 달려 자금성 남쪽성문인 전문(前門) 앞에 위치한 명나라 때부터 민국 시기 까지 정양문 대가로 남 북 으로 845 m 길게 늘어 선수도 북경 에서 가장 번화한 보행거리전문대가 (前門大街)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청난[城南]구역에 위치한 상업지구로 57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옛 북경의 풍모와 역사 문물 등 보존이 가장 완벽한 지역 중의 하나이며 오림 픽 개막직전에 새로 단장한 곳에서 가이드가 주는 30분을 넘겨가며 잡다한 기념품 을 구하고 관람하는 시간으로 우리 일행은 자금성(천안문)으로 이동하는 지하도를 지나 15분여 이동한 곳은 북경 시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천안문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곳으로 건축물로는 천안문, 인민 영웅 기념비 인민 대 회당,모 주석 기념 당, 중국 국가 박물관이 있다는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현재는 1925년 10월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으로 용도가 변경 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어 오늘날 이렇게 관람할 수가 있단다. 그 규모로는 남북길이 960m2 동서 폭이760m2 총면적 72만m2 의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800채의 건물과 9,999개의 방 (실제로는 8,707칸)이 배치되어 있어 약 100만 명이 동시에 모 일수 있는 장소란다. 前身(전신)은 明代(명대)1417년에 건설된 승천 문(承天門) 이다. 이문은1457년 낙뢰로 소실되고 1465 년에 재건되었지만 1644년 이자성 의 북경 공격으로 명조가 멸망 하 였 을 때 같이 소실되어 현제 의문은 청나라 순치 8년(1651년)에 재건된 것으로 현재 의 “천안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개명 되었단다.1949년 10월1일 開國大典(개국대전) 에 시행된 중화인민 共和國(공화국)의 建國式(건국 식)에서 모택동은 이문위에서 건국선언 을 하였다. 그 후 이문은 중화인민 공화국의 상징으로 여겨 졌으며 이후 1952년과 1970년에 대규모 보수와 확장 공사를 통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시내 광장이 오늘날 북경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은 북경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길이는 880m, 너비는 500m, 총면적은 440,000평방미터로 한꺼번에 100만 명의 집회가 가능 하며 이곳은&amp;nbsp;북경의 중심 광장이자 세계에서 제일 큰 광장중의 하나로, 중국 역사상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어요. &lt;BR&gt;즉 1919년의 '5.4운동 1949년의 개국의식,1976년의 주은래를 추도한 '4.5운동'등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이 여기서 발생했죠. 이곳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광장 중심에 우뚝 솟아 있고, 중국 혁명 역사 박물관은 동측, 모택동 주석 기념 당은 남측, 서측에는 인민대회당이 있어요. 이 건물들은 모두 1949년 건국 이후 건설한 것으로, 전문(前門)과천안문은 광장의 남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lt;BR&gt;천안문을 통과하는 커다란 5 개의 통로를 뚫은 성벽위에 목조 누각을 지은 中國의 대표적인 성문 건축이 천안문이며 관광객이 밀려 떠나가듯 우리일행도 함께 하여 천안문을 통과하자 이어지는 거대한 건물 이름 하여 쯔진청 (紫禁城: impenalpalaces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n beijing and shenyang)은 명나라, 청나라 때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든 宮殿(궁전)이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 지 4년째 되든 1406년 수도를 난징에서베이징으로 옮 기고만리장성이후 中國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쯔진청 쌓기에 나섰고 이후 14년간 100만 명의 인부 가 이 공사 에 동원되어 사용된 건축 자재의 양도상상을 초월해 벽돌 1만개와 기와2억 만개 가사용 되었단다. 기둥에 쓰일 나무는 사천지방에서 조달된 것으로 운송에만 4년이 걸렸다. 전각의 받침대와 부조에 쓰인 돌은 50km떨어진 채석장에서 날랐다. 돌의 하나의 무게가 200t에 달하는 것도 있어 당시 부역자들은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든 뒤 날랐고 이런 과정을 거처 완성된 쯔진청에는 황제 일가를 위해서 9천명의 시녀와 일천 명의 내시도 함께 살았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쯔진청의 빛깔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자색 빛깔이며 동시에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 을 상징한다. 북극성은 하늘의 궁전 이 있는 곳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인 황제가사는 궁전 역시 그 하늘 을 상징 하며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자색으로 동시에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상징하여 지었다. 남과 북의 긴축위에 놓인 쯔진청 의 건물 들은 모두 남향이다. 이는 남쪽의 양기를 받고 북쪽의 바람과 음기로부터 황궁 을 보호 하려는 으도 였 단다. 이곳의 중문인 오문의 가은대문은 황제만 사용했으며 현재도 일반인 출입을 금하고 있다. 자금성의 정문을 천안문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으나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이며 천안문은 황성 내성의 남문이란다. 자금성의 주위에는 해자와 성 벽돌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의 넓이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 해자 매사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 궁궐주위의 장벽의 길이는 3km에 이르며 높이는 10m나 되며 네 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있다. 자금성에서 천안문 광장 을 지나 대로를 건너가면 자금성 입구가 나온다. 입구 에 들어서면 오른 쪽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수방사(수도방위)처럼 군인들이 기거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자금성을 철통같은 보안으로 황제를 지켰다. 바닥에는 걸을 때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특별한 벽돌이 깔려 이 벽돌의 효과는 문향만이 아니라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르는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 고 성내에는 후원 을 제외 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나무 뒤에 침입자가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lt;BR&gt;천자의 거처만은 어쩌면 금으로 둘 러 쌓인 감옥 이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성 내부 는 집무처리 를 위한외조 구역과 황제의 주거 구역(내정:內庭) 으로 남쪽 에 있는 외조는 정문인 오문에서 시작된다. 북쪽 방향으로 “태화 문”태화 전““중화전”보화 전“이 한줄 로 늘어서 있고 그東西 에 ”문화 전“무영전”등의 전각이 있다. 높이 35m 면적 2,377m2의 웅장한 태화전은 中國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물물 로 당나라 때에는 주요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란다. 태화전의 마당에는 9만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뜰이 있고 외조의 북쪽으로 내정이 펼 처진다. 내정의 주요 건물로는 “건 청 궁” 교태전“곤 녕 궁 등이 있다. 쯔진청은 8백여 개의 건축물과 9천 여 개의 방이 있고 10 m에 이르는 높은 성벽과50m 넓이의거대한해자로 애 워 쌓인 카프카의 말 그대로 드넓은 뜰과 건물로 지어진 빠져 나올 수 없는 미로 로1949년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에야 비로소 일반인에게 공개 되었고 과거의 궁전 이란 뜻에서 고궁이 되었고 중국 문화의 중심 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다. &lt;BR&gt;가이드의 조그마한 깃발을 표적삼아 자금성을 지나니 광장의 양쪽 통로에 열 지어선탑들을 따라 엎 딘 듯 붉은 이층 지붕 아래(太和展)태화 전 이라 쓰인 현판을 가운데 두고 커다랗고 무겁게 짓 눌 린 듯한 지붕면이 넓은 이층건물 옆으로 돌아서니 화재에 대비할 커다란 손잡이에 구리를 뒤집어 쓴 커다란 항아리가 양쪽에 놓여 운치를 더한다. 각종 의식을 거행하고 주변국들을 복수시켜 모두 가 평화롭게 한다는“태화전“ 그러나 왕조들은 길어야 300년을 가지 못했단다. &lt;BR&gt;태 화 전 을 옆으로 하고 돌아가니 청나라 황제들의 의식 행사할 때 황제가 앉으신 위용 높은 의자 뒷벽에(正大光明)정대광명 이라는 현판이 달린建物 내부에는 그 시 절의부귀 영화를 짐작하게 한 다. 고궁 박물관 을 지나 눈앞에 나타난 앙상한 화암반층 같은 옹벽 은 인공으로 조성된100m 높이 의 경상공원 중턱 은 백성들의 무덤 이란다.그 옆 통로 옆 언덕에 눈에 띄는 흰 소나무(白松)는 200 년의 수령 을 자랑하는 유일한 노송으로 솔잎이 짧은 탓인지 우리나라 黑松(흑 송)이나 赤松(적송) 처 럼 무게가 실리지는 않다. 자금성 후원 뒤뜰에 서 용변과 인원 점검을 끝내고 20 여분 걸어 이동한곳은 북경의 옛 골목을 그대로 보전하여 북경 서민의 삶을 가까이서 둘러 볼 수 있는“쓰 차 하이“(우리 일행은 여행비에 포함되었지만 부부 당 20 불 한다는 인력거 투어)우리를 태운 자전거 人力車(인력거)는 우리 부부가 선두로 2명 1조가 되어 좁은 골목을 따라 힘들어 하는 인력 거 꾼이 이끄는 데로 골목을 누 빌 때 내가 가장 관심 있어 한쪽에 있는 電氣(전기)배전 선로를 눈 여겨 보며 카메라에 담아 본다. 골목길 양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벽으로 구성된 것의 실체는 북경 사람들의 전 주택양식인“사합원 (四合院)”이며 동서남북 네면 위로 세워진 집들이 에워 쌓여하나 정원을 이룬다고 한다. 현지 가이 드 의 설명에 의 하면 대문위에 나무 기둥 툭 튀어나와 기둥 정면에 파란색의 기둥의 숫자에 따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지위를 나타내고 대문입구 좌우에 새겨진 석주(石柱)에 따라 무관(장고, 북 등)과 문관(文官)으로 집안 내력을 구분 한다고 한다. 이집들은 정부로부터 일정액의 보조금을 받으 면서 옛 방식 그대로 가옥을 보존 하고 있으며 대지가 50여 평 되는데 이곳을 찾는 민박집으로 활 용하며 이런 집 들은 우리 돈으로 5억 원쯤 된다고 한다. &lt;BR&gt;일정의 투어가 끝나고 나니 점심시간이 다소 늦었으나 우리를 태운 버스는 30 여분을 이동하여 中國의 北韓(북한) 대사관에서 직영한다는 평양식당 으로 안내 되었고 역시나 우리말에 능숙한 북한 어조의 치마를 입은 美貌(미모)의 아가씨가 우리 를반긴다. 그리 크지 않은 홀과 무대가 있고 둥근 탁자와 의자가 있는데 우리가 안내된 곳은 방 같기 도한 기다란 밥상이 룸에 자리하였고 5~6 명의 미모가 바른 아기씨 들이 날라다 준 평양냉면을 드는 동안 무대에서는 음악에 맞추어 우리는 하나 “아리랑”등 을 노래하여 흥을 돋고 분위기를 만드느라 부산하다. &lt;BR&gt;오늘의 스케줄도 거의 끝나가 숙소로 가는 길 20여분 걸려 이동한곳은 사전에 연락되어 왔다는 中國의 농산물(검정 깨,잣) 을 실은 조그마한 화물 차량에 우리가 직접 보고 구입케 한다며 더불어 둘리지는 안는다며 하는 가이드의 말에 中國에서 다시는 아니 구하지 아니 하겠다는 검정깨를 가이드의 安全(안전) 한다는 말을 듣고 한정량에 해당하는 검은깨 10kg를 구입 하고 그곳에서 걸어서 잠시 후 옆에 있는 건물을 따라 들어가니 그곳이 우리 한국 관광객이 선호한다는 中國 에 가면 아니 짝 뚱 상품 구입을 위해 중국 의 旅行(여행)을 자주 한다는 짝퉁 매장 단속이 심 해서 요란 스럽 지도 크지도 않다며 조그마한 3층 내 가게에는 프랑스 의 유명한“루비 이똥”가방 등이 있어 몇 사람만이 구입하고 우리일행 역시 구경으로 시간을 같이하고 다음 이동 한곳은 관광지 마다 의 례 안내 되는 진주 보석 상점으로 안내 되었으나 누구하나 구입 하지 않아 다소는 민망 스럽 기만할 뿐이다. &lt;BR&gt;마지 막 다섯 째날 11월03 일 (화요일) 맑음/흐림 &lt;BR&gt;4일간의 숙박을 했든 best western 호텔도 오늘아침에는 여행 가방을 챙겨야한다.10시55분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했기에 출국수속의 여유 때문에 상시와 같은 아침7시에 챙긴 여행 가방을 끌고 호텔 앞에 대기한 버스에 탑승하고 인원체크 가 끝나는 대로 한 시간 걸려 달리는 버스에서는 가이드의 이어지는 마이크 소리 따라 웅장하게 나래를 편 베이징 국제공항 정시(定時)에 도착했고 간단한 출국수속을 안내 해준 가이드와 헤어짐 의 인사를 나누고 쾌도열차를 타고 10여분 많은 여행객 이열지어선 대열에서 우리역시 아무 탈 없이 출국(出國)수속을 끝내고 기다리는 90 여분의 시간은 청사 내 면세점에서 필요한 면세품들을 사고는 티켓 팅 후 터널식 게이트를 따라 기종 A 320-200 제트 여객기 5032편의 지정된 D-30번에 자리를 하고 나니 얼마 후 이륙을 위한 활주 로를 따라 10여분 이동한 비행기는 안내방송과 함께 음속을 높여가며 기체가 이륙을 하니 엊그제 이 공 항이 눈 때문에 마비됨을 알려 라도 주는 듯 활주로를 제외하곤 거의가 하 얗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lt;BR&gt;조그마한 창밖으로 맑은 창공 이 한결 가벼운 마음이다. 이륙한지 5분여 기수를 동남쪽으로 돌리 는지 기내 창으로 드리우는 해 볕이 기내를 선회한다. 상공으로 떠올라도 내려다보이는 베이징의 들녘은 고속도로만 검은 줄로 이어 지며 이따금 저수지 연못이 검게 드리울 뿐 온통 하얀 들녘이다. 1시17분 中國의 육지를 벗어난 기체는 다 렌과 엔 타이 상공(上空)을 지나는지 내려다보이는 것은 맑은 상공에서 비추이는 햇빛 따라 검푸른 바다 상공이다. 기내 모니터에서 알리는 11시 47분 中國 公海(공해)上을 나는 기체(機體)는 고도 1277km시속 898 km -59 도를 그리고 남은 거리 433 km 를 알리며 그러니까 우리시각 13시 50분에 무안공항에 도착(到着) 한단다. 지금시간 13시10분 서해영공에 들어오니 하늘이 온통 구름에 깔려있다. &lt;BR&gt;동체가 심하게 흔들 리는 것은 깔린 구름을 통과 하는 것 고도(高度)가 낮아지며 남은 비행거리224 km 고도 5300km로 낮아진 비행기는 시속 500km 한가하고 여유로운 무안 공항에도착하면 4박5일 을 함께했든 우리 일행은 모두가 헤어 저야 할 시간이다. 모두가 신종 푸 루 때문에 여행을 기피하고 여행객이 적은 탓으로 값싸게 알찬 여행 이였다고 자평 할 수 있는 4박5일의 잊지 못할 여정을 위하여 이글을 남긴다.&amp;nbsp;&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2010년 01월 09일 여행기를 마감 하며 정 찬 열 記 &lt;BR&gt;&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여행 이야기</category>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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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9 Jun 2013 16:39: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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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3년 6월 9일 오후 04:09</title>
      <link>https://nk-ele.tistory.com/28</link>
      <description>&lt;p&gt;&lt;br&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021B524C51B42A9710?original&quot; class=&quot;txc-image tx-blog-simple-img&quot; style=&quot;clear:none;float:none;&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320&quot; /&gt;&lt;/p&gt;&lt;p&gt;         ●.또 하루가 시작 되며....!(효병원에 입원한 12년5월6일 아침)
&lt;br&gt;지는 해와 솟는 해가 다른 것이 없는데도.     밝아오는 새아침은 무엇이 다르랴!
&lt;br&gt;             사람들은 오늘을 기대하고 염원하며    또 다시 솟는 해에 하루를 기대하네. 
&lt;br&gt;밝아오는 여명 때에 잠을 깨운  장끼의 울음소리   자동차의 소음까지 합창하여 잠을 께우네.
&lt;br&gt;             한 병실에 늦잠취한  환자들을 께울 세라.    조심 하며 병실을 나~아가네.
&lt;br&gt;
&lt;br&gt;오늘도 새벽운동 유안공원 찾아 가면.         어제처럼 다름없이 운동하는 사람들. 
&lt;br&gt;             오늘도어제도 무엇 이 다르랴만       공원 숲 무성하고 꽃피우고 색다르네.
&lt;br&gt;아픈 가슴뼈 움켜가며 몇바퀴를 돌고 돌아     밝아오는 새아침은 다른바가 없지만.
&lt;br&gt;             간밤 나린 비에 물웅덩이 젖어있고.    고인자국  노~랗게 칠자국만 남아있네.
&lt;br&gt;&lt;br&gt;&lt;/p&gt;</description>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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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9 Jun 2013 16:11:2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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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운사의 동백꽃</title>
      <link>https://nk-ele.tistory.com/27</link>
      <description>&lt;P&gt;&lt;!--StartFragment--&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휴먼옛체;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quot; &gt;&lt;/SPAN&gt;&lt;U style=&quot;text-underline: #000000 single&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휴먼옛체;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quot; &gt;&lt;/SPAN&gt;&lt;/U&gt;&lt;U style=&quot;text-underline: #000000 single&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4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 . 선운사 의 동백꽃&lt;/SPAN&gt;&lt;/U&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휴먼옛체;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quot; &gt; (&lt;/SPAN&gt;&lt;U style=&quot;text-underline: #000000 single&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휴먼옛체;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quot; &gt;2012. 12. 01)&lt;/SPAN&gt;&lt;/U&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휴먼옛체;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quot; &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선운사 뒷산에 어우러진 동백꽃 널 보자고 오늘도 차를 타고 달려 왔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그 옛날 예 올 때면 많은 시간 걸렸는데. 지금은 터널 뚫어 고속도로 빠르다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오동도의 동백꽃과 강진에 백련사의 곱게 피는 동백꽃이 마음속에 손짓해도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선운사 동백 찾아 오늘도 찾아왔네. 고찰 뒤에 단지되어 피워주는 꽃이 좋아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산길 따라 걷고 걸어 정신수양 좋다하여. 푸른 송(松)에 품어 자란 산사동백 피어나니.&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선운사(禪澐寺) 목탁소리 정겹기 한없어라. 흐르는 냇물 따라 사뿐 이 걷는 걸음&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함께 찾은 동서 처제 우리부부 즐거워라. 동장군도 마다않고 개화제철 서두르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금년에도 만났으니 내년에도 기약 할 제, 춘풍마저 비웃으며 일찍 피는 선운동백&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싱싱한 푸른 잎에 피는 꽃을 보는 것은 찾아주는 건강소원 동백꽃이 빌어주네. &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class=바탕글&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2357CD4951B42A3247&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exif=&quot;{}&quot; actualwidth=&quot;755&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755&quot;  id=&quot;A_2357CD4951B42A3247A2F7&quot;/&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quot; &gt;&lt;/SPAN&gt;&lt;/P&gt;</description>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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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9 Jun 2013 16:10:0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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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羅州를 本貫으로 하는 姓氏</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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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羅州 의 본관(本貫)성씨(姓 氏) &lt;BR&gt;198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성씨별 인구로는 김(金)씨가 993 만 명에 21.6%를 차지했으며 &lt;BR&gt;다음은 이(李)씨로 680만 명에 14.8% 다음은 박(朴)씨로 390만 명에 8.5% 네 번째인 최(崔)씨는 217만명 에 4.7% 다섯 번째인 정(鄭)씨는 4.4%에 201만 명으로 조사 되었으며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한 한국에는286姓에 3349본관(本貫)이였고 2003년 1월29잂 통계청 이 발표한 2002년도 인구주택 조사에 의하면 현제 286개 성씨에 4,179개의 본관(本貫)으로 김 씨가 가장 많은 21.8%이며 1985년도 순위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정씨는 64개 본관에 618,049의 가구 수에 1,982,640명으로 동래 정씨가 가장 많은 137,524가구에 442,363명이며 가장 적은 옥천 정씨(鄭 氏)는307가구에 1,050명이고 한편 본관별로는 김해김씨(金海 金氏) 다음은 밀양(密陽)박씨(朴 氏),그리고 전주(全州)이씨(李 氏)며 경주김씨, 경주이씨 였다. 한편 경주에 본관(本貫)을 둔 성씨가 87개로 가장 많았으며 진주, 전주, 밀양, 청주, 등의 순 이였다. 여기서는 나주(羅州)를 관향(貫鄕)의로 하는 씨족(氏族)중 년원(年原)이 분명한 씨족의 연원과 인구와 가구 수를 간략 하게 소개(紹介)한다. 우선나주를 관향으로 하는 17성씨의 내력과 1,000명 이상 거주 인구가 되는 성씨를(가, 나, 다, 순) 나열하겠다. &lt;BR&gt;&lt;BR&gt;(1) 나주 김씨(羅州 金 氏) &lt;BR&gt;시조(始祖)김 운발(金 雲 發)은 新羅경순왕의 둘째 아들인 김굉 의 맏아들이다. “조선(朝鮮)씨족(氏族)통보(統 譜)”의 기록에 의하면 김 굉 은 신라가 망하자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法名)을 범 공(梵 空)으로 하여 불가로 귀의(歸意)하였는데 그가 입산하기 전에 고려(高麗)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첫째아들 김 운발(金 雲髮)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나주(羅州)군에 봉(奉)하고 둘째아들 김 우발(金 偶發)은 경주 군(慶州 君)에 봉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운발(雲髮)을 시조(始祖)로하고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누대에 걸처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긍지를 심었다. 2002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나주(羅州)김씨(氏)는 남한에 총 14,387가구에 46,4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lt;BR&gt;&lt;BR&gt;(2) 금성(錦 城)나(羅)씨(氏) &lt;BR&gt;당나라 태종 때 상서좌복야 나 지강 이 고구려(高句麗)정벌을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亡命)하여 발라 현 인 나주(羅州)에 정착 한 후 신라(新羅)때에 벼슬인 좌승(左丞)상에 이르렀다. 그 후 신라 효공왕(孝恭王)때 에 나경이 나주사손 으로 봉(奉)해지고 나주(羅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였으나 후손의 기록이 없어져서 고려(高麗)초(初)에 삼한벽상 일등공신(一等功臣)인 나 총례(羅 聰 禮)를 시조 로 나유(羅裕:?~1292)) 는 충렬왕14년(1288년)무자년 5월 신축일. 만호(萬戶)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나유(羅裕)가 군사를 거느리고 원나라 원정길에 나섰다. 나주 나씨(羅州羅氏) 집안으로 원종~충렬왕 때 음서로 경선점녹사(慶仙店錄事)로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견룡행수(牽龍行首)·대장군을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상장군(上將軍)·세자원빈(世子元賓)을 역임했다. 이 집안은 삼한공신(三韓功臣) 나총례(羅聰禮)의 후손으로 나득황(羅得璜)이 최항(崔沆)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고 원종대 이후 나유(羅裕)—나익희(羅益禧) 부자가 계속 고위 관직에 오르면서 세족의 기반을 갖추었다. 특히 나유는 삼별초(三別抄) 항쟁군의 진압과 여원(麗元) 연합군의 일본정벌(日本征伐) 및 카다안[哈丹] 침입의 격퇴 등을 통해 전공을 세우고 원나라로부터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이라는 직함을 받았다.그후 충렬왕18년(1292년)임진(壬辰)년6月정축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나유(羅裕)가 죽었다.{김용선 편, 「나익희(羅益禧) 묘지명」·「조위(趙瑋)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김광철, 『고려후기 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84~85쪽 및 [나주 나씨] 세계도.최영호, 「13세기 중엽 조문주의 활동과 정치적 성향」 『한국중세사연구』 16, 2004.} 그후 英祖때에 무신(戊申)흉변(凶變)으 화를 면하려고 나주(羅州)의 옛 이름인 금성(錦城)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그러나 나 총례 의 후손이면서 아직도 본관을 옛 본관인 나주를 바꾸지 않고 羅州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계통도 있고 안정, 군위, 수성 등으로 본관을 하는 계통 도 있다. &lt;BR&gt;2002년 통계조사 시 금성 羅씨는 남한에 12,869가구에 40,493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lt;BR&gt;&lt;BR&gt;(3) 나주(羅州)나 씨(羅 氏) &lt;BR&gt;당(唐)태종 때에 수선 관 을 지낸 나부(羅 富)를 시조(始祖)로 하고 여황(艅 艎)羅 氏 로 하였으나 고려(高麗)성종(成宗)때 여황이 나주(羅州)로 바뀌면서 羅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을 알 수가 없어 나 득 규(羅 得 虯)를 中시조(始祖)1세조(世祖)로 하고 있다. &lt;BR&gt;2002년 통계청 나주(羅州)나(羅)氏 기록결과는 남한에 총 33,600가구에 108,139명이 조사 되었다. &lt;BR&gt;&lt;BR&gt;(4) 남 평 문 씨(南 平 文 氏) &lt;BR&gt;시조 문 다 성(文 多 省)은 신라(新羅)20대 자비(慈悲)왕 때의 사람으로 출생(出生)에 대한 전설(傳說)이 전해온다. 남 평 현(南 平 縣)지금 으 전남 나주시 남 평 읍 장 자리 에 있는 장자지(長 子 池)라는 연못가에 큰 바위가 있다. 472年 新羅 자비왕15년 2월에 군주가 바위아래서 놀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서 오색기운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여긴 군주(君主)가 사다리를 가져 오게 하여 올라가보니 돌로 된 함안에 피부가 백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갓난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그 군주가 대려다 키웠는데 다섯 살에 글을 저절로 깨우치고 무략이 뛰어나며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등 총기가 있어 성을 “문” 이라고 하고 이름을 다 성(多省)이라고 했다. (돌로 된 함에 “문“ 자가 새겨져있어 성을 ”문“이라고 했다고도 한다.)그 후 500년 지증왕(智證王)1년에 중시 아랑(中侍 餓狼)이 되고 540년 진흥왕(眞興王)원년에 대 국사(577年)진지왕(眞智王)2년에 대아랑 대국 사가되었다. 지금도 그곳 장자지 연못에는 6미터쯤 되는 바위가 있고 바위위에 ”문 암”이라는 비석(碑石)을 세워놓아 文 씨 시조(始祖)의 탄생지(誕生地)임을 말해주고 있다. 장자 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다고 한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 평 문 씨 는 남한에 총 118,491가구에 380,530명 으 로 조사 되었다.. &lt;BR&gt;&lt;BR&gt;(5)나주(羅州)박(朴)氏 &lt;BR&gt;시조(始祖)병 묵(炳 黙)은 나주에 토착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 했고 그의 아들 덕 영(德 瑛)은 호군(護軍)으로 연 성군(蓮 城 君)에 봉(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병 묵 을 시조로 하고 羅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그의 선조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병 묵 의 손자 숙(璹)이 조선이 개국(開國)된 후 이조(吏曹)판서(判書)에 올라 정랑을 지낸 아들 선문(瑄 文)과 사복시정을 역임한 손자 제창(濟 昌)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 밖의 인물로는 판관(判官)을 지낸 제창의 손자 와 무신(武臣)으로 유명했던 덕명(德 命)이 뛰어났으며 장 사 랑(將 仕 郞)에 오른 순영(淳 英)은 의관(議官)을 역임한 순택(淳 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나주(羅州)박(朴)氏는남한에 총 1,010가구에 3,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lt;BR&gt;&lt;BR&gt;(6) 반 남(潘 南)박(朴)氏 &lt;BR&gt;시조(始祖)박 응 주(朴 應 主)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선조를 알 수가 없으나 반 남 현(羅州)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호장 을 지냈고 그의 6세손 박은(朴 訔)이 조선 초기 왕자의 난 때 태종(太宗)을 도와 익대 동덕(翊 戴 東 德)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좌의정에 이르렀고 반 남군(潘 南 君)에 봉(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박 응 주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반 남(潘 南)으로 하였다. 박 은(訔), 박 숭 질(崇 質),박세채, 박 종 악, 박종훈, 박 회수 등과 상신, 박 태상, 박 규수, 등의 대제학(大提學) 의 박세당(世 堂), 박 지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박소, 박 응 남, 박 응 복, 박 태보, 등의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215명, 삼신7명, 대제학2명, 왕비2명과 조선후기에 판서 급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박(朴)씨 중에서 벼슬이 가장 화려 하다. 2002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 하면 반남 박(潘 南 朴)씨는 남한에 총 43,300가구에 239,4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천기를누설한 박지관 (반남박씨의 전설(傳說) &lt;BR&gt;반남 박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을 지낸 박응주인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박의는 이웃마을에 사는 박씨 성을 가진 지관을 모셔다가 명당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박지관은 고개 너머 자미산(자미산성이 있는 산)의 느긋한 산허리를 둘러보더니 덕흥리 동쪽에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lt;BR&gt;풍수 지리라면 박의도 조금은 아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박지관이 잡아주는 자리보다 차라리 그 밑이 더 좋을 듯 싶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박지관이 정해주는 곳이라 우선 표를 찍어놓고 속으로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박지관의 뒤를 밟아 보았다. 집으로 돌아간 박지관이 부인의 마중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박의는 재빠르게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부인이 &quot;호장어른 묘자리는 괜찮은 데로 잡아 드렸나요?&quot;라고 묻자 박지관이 기막힌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가르쳐 줬다가는 아무래도 천기를 누설한 죄로 화를 입을 것 같아 그 자리를 살짝 피해 좀 위쪽에 있는 자리를 잡아주었지. 그 자리도 무던합디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lt;BR&gt;이를 들은 박의는 이튿날 박지관이 말한 천하의 명당에 무덤을 쓰기로 하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이를 도와주려고 고개를 넘어온 박지관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박의에게 &quot;왜 내가 잡아주는 자리는 피하느냐&quot;고 물었더니. 이 자리가 더 좋을 듯 싶어서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박지관은 &quot;이것은 모두가 운명일세. 사실 자네가 파는 이 자리가 명당일세. 내가 화를 입을 것같아 입을 다물었는데 자네가 알아냈으니 자네 가문의 복일세&quot;라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lt;BR&gt;그런데 박의가 다시 구덩이를 파려고 하니 구덩이에서 새만큼이나 큰 벌이 솟아 나오더니 고개로 넘어가던 박지관의 뒤통수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후 고려 때의 아전이었던 박응주의 후손은 현손 박상충이 예조정랑에 이르고 이어 벼슬실이 끊기지 않아 조선시대에 반남 박씨는 명문거족이 되었다. 이를 두고 후손들은 명당의 발복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박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고개를 '벌고개'라 부르고, 박응주의 묘자리를 '벌명당'이라 부르고 있다. 박씨 문중에서는 벌고개 바위에다 이를 기려 '峰峴'이라 새기고, 오늘날까지 매년 시월 보름날 박지관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한다. &lt;BR&gt;&lt;BR&gt;(7) 금성 범 씨(錦 城 范 氏) &lt;BR&gt;시조 범 승조(范 承 組)는 원래 원나라의 예부시랑 으로 고려(高麗)충렬(忠烈)왕비(王妃)인 제국대장공주를 배종(背腫)하여 우리나라에 와 나주(羅州)에 터를 잡은 것이 범 씨의 시초다. 그의 아들 범 유수(范 有 脽)는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여진의 난에 참가 하여 평한 공으로 공훈 1등에 금성 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금성(錦 城)으로 하였다. 범 씨의 본관은 금성, 광주, 안주,3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仝 原)이므로 현재는 금성 범 씨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2002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르면 금성 범 씨는 남한 에 총900가구에 2,991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lt;BR&gt;(8).남 평(南 平)서씨(徐 氏) &lt;BR&gt;시조(始祖)서호(徐 灝)는 서신일(徐 神 逸)의 후손으로 남 평 에서 대대로 살아왔고 그의 손자인 서지(徐 祉)가 조선(朝鮮)10대(代)왕인 연산군(燕山君)때 문과에 급재 하여 중종(中宗)때 이조 판서에 올랐다 .그래서 이천 서 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남 평 을 본관으로 하였다. &lt;BR&gt;2002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남 평 서 씨는 남한에 총 361가구에 인구수가 9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lt;BR&gt;(9). 나주 양씨(羅州 梁 氏) &lt;BR&gt;나주 양씨 시조(始祖)는 양열(梁 悅)으 아들로 조선 중종조(中 宗祖)에 문과 출신으로 도사(都事)를 역임한 양인(梁 認)이다. 이 성본의 연한은 접할 수 없고 다만 2002年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514가구 인구 1,671명이 거주 하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lt;BR&gt;&lt;BR&gt;(10).나주 오씨 (羅州 吳 氏) &lt;BR&gt;羅州 오(吳)씨의 시조(始祖)오 숙 규(吳 淑 珪)는 고려(高麗)중엽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도 시조(道 始祖)오첨 의(僉 義) 24세손 (해주오씨의 시조) 의아들 5형제 중 다섯째 아들이다. 그 후 3대에 걸친 후손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오 숙 규를 시조로 하고 오 숙 규 의 5세손 오언(吳 偃)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오언은 고려 때 중랑장(中 郞 葬)을 지내고 그의 5세손 오 자치(吳 自治)가 조선(朝鮮)세조(世祖)때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나주 군(羅州 郡)에 봉해지자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또 하나의 설은 나주오씨 시호를 903년 이전에 후백제 금성지역의 호족들 중 도서연안세력[島嶼沿岸勢力:오다련(고려2대 혜종(惠宗)의 외조부)영산강하구의 연안세력(沿岸勢力)과 영암의 최 지몽 이끄는 세력(勢力)그리고 압해도의 능 창 이 이끄는 도서해양세력(島嶼海洋勢力)의 도움으로 王建이 백재의 땅인 금성(錦 城)을 함락 받은 궁예(弓裔)는 금성을 羅州로 개칭하고 王建의 계급을 올려 알찬(閼粲)으로 삼으면서 호족 중 도서연안세력 오다련 에게 羅州오씨(吳 氏)시호 와 나 종례 에게 羅州나씨(羅 氏)시호를 하사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삼국사기 궁예 전(三國史記弓裔 傳)”에는 나주지명 개칭을 911년이라고 기술되어 다소 혼란스럽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 오(吳) 씨는 남한에 총 7,916가구에25,5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lt;BR&gt;(11).나주 이씨(羅州 李 氏) &lt;BR&gt;시조 이 철우(李 哲 祐)는 누대에 걸 처 나주(羅州)에 토착(土着)세거한 사족(士族)으 후손으로 조선(朝鮮)세조(世祖)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으며 평남(平 南)개천(開川)군 마장으로 이거 하였다. 그리 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의 전(前) 세거지(世居 地)인 나주(羅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무술 보(戊戌 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시대 판 문하부사(判 門下府使)를 지낸 문 정공(文 靖 公) 이색(李穡: 한산 이씨)의 7세손 이라고 했다. &lt;BR&gt;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이씨는 남한에 총1,988가구에 6,2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lt;BR&gt;(12). 남 평 이 씨(南 平 李 氏) &lt;BR&gt;시조는 이 동 말(李 東 秣)이다. 조선조에 정헌대부(正 憲 大夫)에 올라 병조 판서를 역임 한 후 보조 공신(輔助 功臣)으로 녹훈(錄勳)되어 남 평 군(南 平 郡)에 봉해 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동 말(東 秣)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을 남 평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lt;BR&gt;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 평 이 씨는 남한에 총 299가구에 1,0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lt;BR&gt;(13). 나주 임씨(羅州 林 氏) &lt;BR&gt;시조는 고려 의 대장군(大將軍) 임 비(林 疪)이다. 1281년(고려 충렬왕 7년)왕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시종 보좌 공신 2등에 책 록 되고 대장군(大將軍) 충청도(忠 淸道) 도(都)지휘(指揮) 사판 사재사가(使 判 司 宰 寺 事)에 이르렀다. 임 비 의 9세손 임 탁(林 卓)이 해남(海 南)감무(監務)를 지내다가 이성개가 조선을 개국 하자 관직을 버리고 회진으로 돌아가 살면서 본관을 회진(會 津)으로 하였으나 회진 현이 나주에 속해 짐에 따라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lt;BR&gt;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에 총73,556가구에 236,877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14). 나주 장 씨(羅州 張 氏) &lt;BR&gt;시조 장세동(張 世 東)은 장 정필의 후손인 장유의 22세손이며 부호군 을 지낸 장 호 채 의 둘째 아들이다.장세동 은 조선(朝鮮)이조(李朝)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나주(羅州)에서 살다가 황해도(黃海道)장연으로 이사 하였는데 고향인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lt;BR&gt;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에 총1,170가구에 3,662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lt;BR&gt;(15). 나주(羅州)정 씨(鄭 氏) &lt;BR&gt;시조는 고려 17대왕 인종(仁宗)무렵의 인물로 휘(諱)는 해(諧: 追封 軍器監 判事)는 고려 때 벼슬을 했고 군기감에 추증(追增)되었다. 그 후 후손들은 나주에 정착 세거 하면서 호족을 이루어 해(諧)를 1세로 하고 본관을 나주 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始祖)정해(鄭 諧),의 증손자(4세)설재(雪齎)정가신(鄭可臣:1224~1298년)은 왕이 친히 내린 이름이며 자는 헌지(獻 之),아호는 설재(雪 齋),시호는 문정(文 靖)이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향공(鄕貢)진사(進士) 정 송수(鄭 松 壽)의 아들로 고려 고종 11년(1224년)갑신년에 태어나 노안면 금안리(金鞍里)에서 자랐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 琪)를 따라 상경(上京)하여 1255년(고려 고종 42년)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 3년(1277년) 보문 각 대제(寶 文 閣 待制)가 되고 정녕 공(貞 寧 公)에 봉해졌다. 이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를 거처 비서 윤(秘書 尹)으로 필적이 되고 1280년(충렬왕6년)승지(承旨)가 되었다. 1284년(충렬왕10년)밀직사(密直司)로서 정조 사(正朝 士)가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1287년 감찰대부(監察大夫),판삼사사(判 三司 使)를 역임 후 1290년(고려 충렬왕 16년)정당 문학(政堂 文學)을 거쳐 첨의중찬 판 전리사사(僉議中贊 判 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가 되었으며 세자를 따라 재차 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 절사(聖 節 使)로서 3차례나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의(僉議)시랑(侍郞)찬성(贊成)사, 세자(世子)이사(貳 師)가 되었으며 그 후 벼슬이 여러 번 승배(陞拜) 되었는데 그는 명(名)문장가(文章家)로 서 “천추(千秋)금경 록”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청렴 결백 하였다.졸(卒)후에는 충선 왕묘(忠宣 王廟)에 배향되고 나주의 설재서원(雪齋書院)과 함평의 오산 사(鰲山 祠)와 세덕 사(世德 祠)에 모시였다. 삼불의 헌공(三 不 義 軒 公)정초(鄭 初:1344~14236년)는 정가신의 증손으로 태종(5년,1405년) 문과 에 급제 하여 집현전 교리, 호조 판서 을 지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가신의 5세손 정식(鄭軾:1407~1467년)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 하였고 함길도 도 관찰사(都 觀察使)로 야인 정벌(野人 征 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自 憲 大夫)로 지중추부사(知 中 樞 府 事) 에 이르렀다. &lt;BR&gt;&lt;BR&gt;그 밖의 인물로는 예조판서(禮曹判書)를 지낸 정국(鄭 菊)과 이조 정랑(李朝 正 郞)을 지낸 정 일 헌(鄭 逸 軒)과 정심(鄭 諶:1520~1602년)부사(府使)를 역임한 정상(鄭 詳:1533~1609년)등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으로 일컬어진 정 여린(鄭 如 麟:1564~1640년)이 뛰어났다. 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 부호군(龍 懩 衛 副 護軍)을 지낸 정 기수 (鄭 麒 壽)와 수군방어사를 지낸 정봉수(鄭鳳壽),병조(兵曹)참판(參判)에 추증된 정 응(鄭 應),죽 우당(竹 友 堂)정란(鄭 瀾:1583~1656년),묵 재 공(黙 齋 公)정 눌(鄭 訥)등이 가문을 대표 하는 후손 들이다. &lt;BR&gt;나주정씨(羅州 鄭氏)는 본관이 나주이나 처음 족보인 을유보(乙酉 譜)와 신해보(辛亥譜)에는 인산(麟山)으로 되어있다. 대부분이 본관을 나주로 쓰고 있으나 아직도 본관을 금성(錦城)으로 쓰고 있는 종친이 있는데 이는 나주의 고호(古號)가 금성(錦城)이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지만 지금현실은 관향(貫鄕)을 통일함이 절실하다. 이는 하동정씨(河東鄭氏) 에서 분적 한 금성정씨(錦 城 鄭 氏)가 따로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lt;BR&gt;※설재 서원(雪 齋 書院):전남도 지정 문화재 93호로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 평리 649에 있다. 설재 정가신을 배향하기 위하여 숙종14년(1688년)나주시 노안면 금안 동에 최초로 창건되어 현재는 9위를 향사 하고 있다. &lt;BR&gt;숙종19년(1693년)설재 선생의 5세손으로 세종 때 효자정려를 받은 경무 공 영모 정, 정식(鄭軾),이 추배(趨拜)되었다. 숙종38년(1712년)여름에는 향사우로 승격되어 설재 서원(雪 齋 書院)이 되었다. 경종3년(1723년)노안면 금안 동에서 영 평리 영안 마을로 이건하여 강당인 영 모재(靈 茅 齋)를 건립 하였고 암헌(岩 軒)신장(申檣:1381~1433년)후손인 정심(鄭 諶)을 추배 하여 4위가 배향 되었다. 고종5년(1868년)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 되었다가 1900년 영모 재를 복원하여 제향(祭香)하다가 1953년 서원을 복설 하면서 이때 창 주공(滄 洲 公),정상(鄭 詳),정 여린(鄭 如 鱗),정란(鄭 瀾)을 추배하고 1988년 삼불 의 헌공(三 不 義 軒 公),정초(鄭 初),묵재 공(墨 齋 公) 정 눌(鄭 訥)등이 추배 되었다. &lt;BR&gt;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羅州 鄭氏는 남한에 총29,868가구에 93,845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lt;BR&gt;(16). 금성 정씨 (錦城鄭氏) &lt;BR&gt;하동정씨(河東鄭 氏)도정(道正)을 시조(始祖)로 하는 7세손(世孫) 정성(鄭 盛)은 1314년(고려 숙종 왕1년)문과에 급제 하여 대광(大 匡)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금성 군(錦城君 :羅州의별호)에 봉해져 이거 하였으므로 하동 정씨(河東 鄭氏)에서 분관(分貫)하여 본관을 금성(錦 城)정씨로 사용한 정확한 기록은 서술 할수 없으나 1700여년 무렵 종중의 합의에 의하여 도정(道正)을 시조(始祖)로 하는 하동정씨(河東 鄭氏)로 합본(合本) 통용(通用)하고 있으나 그 후 9세 정지(鄭地:1347~1391)를 경렬공 파조(景烈公派租)로 하는 경렬공파의 5세조이며 차자감찰공인 확(穫)의 후손 사형제(四兄弟)중 네째 자손 정읍 고부(古阜)문중의 현감 공 충종(忠宗)후손 중 첫째. 셋째, 넷째 손은 하동정씨 경렬공파로 환원되었고 본관을 금성(錦 城) 정씨로 주장해 지속해오는 둘째 하동정씨 14세손이며 금성군 성(盛)선조(先祖)에서 分本된 금성정씨(錦城鄭氏) 를 그대로 이어 오고 있는 조선중기의 충무공 정충신 금남군(錦南君)의 후손 들 은 충남 서산시 지곡면, 당진군 대호지면, 전북익산시 춘포면 오산리, 전북&amp;nbsp;장수군 장계면과 남원시에 주로 집성촌이 있으며&amp;nbsp;전북 고창군과 전남 장성군 과 남면 월곡, 담양군, 경남 함양 등 일원 에&amp;nbsp;&amp;nbsp;는 극히 일부 후손만이 씨족사 에 기술하는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amp;nbsp;금성정씨(錦城鄭氏) 세계 를 이어오고 있는 후손들 뿐 이시다. &lt;BR&gt;대표적인 인물로는 河東鄭氏 7世祖 성(盛:錦城君)에서 금성정씨 를 그대로 이어 오고 있는 윤(倫:地의 八世孫)은 판중추부사(判中樞 府事)에 증직(贈職)되고 윤(倫)의 아들 충신(忠信)은 1623년(인조1년)안주(安州)목사(牧使)로 방어사(防禦 使)를 겸하고 이듬해 이괄(李适)의 난이 일어나 자 전(前)부대장(部隊長)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으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대도호부사(大都護 府使)를 지낸 훌륭한 분이다. 뿐만이 아니라 천문(天文) 지리(地理)의술 등에 능통 했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호군(部 護軍)을 지낸 정 우직(鄭 友直),정 우현(鄭 友賢),정 태석(鄭 泰 石),정 상로(鄭 相老),등과 공조 참의(工曹 參議)를 지낸 정기홍(鄭 基鴻),이 유명 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낸 정 재실(鄭 在實)과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한 정 광로(鄭 光老)가 가문을 빛냈다. 2000년도 인구 조사에 의 하면 금성 정씨로 2,112가구에 총 6,782명 이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그러나 하동정씨(6세: 좌윤공)난연”이하손이 도정을 시조로 하는 하동 정씨로 환본되어 정리되는 정황을 파악하지 못하여 2000년의 인구조사에는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이 금성 정씨로 그리고 가구 수와 인구가 많게 조사 기록 되어 있음을 밝히고 싶으며 모두에서 언급 한바와 같이 일부의 자손 만이금성정씨 의 대(代) 를 이어 오고 있음니다. &lt;BR&gt;&lt;BR&gt;(17). 나주(羅州)정씨(丁 氏) &lt;BR&gt;시조(始祖)정 윤종(丁 允 宗)은 고려 시대에 검교(檢校)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나주 정씨는 숙종과 경종 때 까지는 본관을 압해로 써오다가 압해가 나주로 속하게 되자 본관을 나주(羅州)로 고치게 되었다. 그런대 최근에 와서는 압해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인식이 새롭게 대두되어 더러는 압해정씨 또는 나주압해정씨 등으로 혼용하고 있다. 나주 정씨 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본관을 나주(羅州)정씨(丁 氏)로 쓰고 있다. &lt;BR&gt;한편 중국 당나라에서 대양 군에 봉군 되어 승상(丞相)을 역임하다 압해도에 정착한 정 덕성(丁 德 盛)을 시조로 한 압해 정씨가 존재하며1762(영조 38)∼1836(헌종 2)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정조14년(1790년)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인공도시 수원과 화성에 수원성을 축조 할 때 정조의 명을 받아 기중도설(起重圖說)등의 글을남기고 우리나라 최초로 기중기를 이용한 성을 쌓은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과 그의 웃 형제인 정약현(丁若鉉),정약전(丁若銓),우리나라 최초로 언문으로 천주교요지(天主敎要旨)를 만든 정약종(丁若鍾)이 유명하다. &lt;BR&gt;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羅州 丁 氏는 남한에 총28,786가구에 82,863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lt;BR&gt;(18). 나주(羅州)최씨(崔 氏) &lt;BR&gt;나주 최 씨는 동성동본 이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첫째 계통은 탐진 최 씨 계파의 중조로 조선(朝鮮)세종(世宗)때에 진의 부위(進 義 副尉)에 올랐던 최 정원(崔 井 元)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청 양 파(靑 陽 派)이며 다른 한 계통은 조선 명종(明宗)때 진사(進士)였던 최 택(崔 澤)을 시조(始祖)로 한 가선대부에 오른 최 논 금(崔 論 金)을 1세조로 하는 보령 파(保 寧 派)이다. 그러나 탐진 최 씨 세보에 의하면 최 정원은 탐진 최 씨 강진파의 중조인 최 준량(崔 浚 良)계에 합보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나주최씨 세보에는 정원의 손자 금 남공(錦 南 公)부(膚)가 나주 출신으로 후손들이 충남 보령과 청양 등지에 세거하면서 금 남공 출신지인 나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한편 한국(韓國)성씨(姓氏)총감(摠監) 탐 진 최 씨 조에는 최 부 는 탐진 최씨 13세손으로 금남파의 중조라고 기록 되어 있다. &lt;BR&gt;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羅州 崔 氏는 남한에 총1,922가구에6,018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t;BR&gt;&lt;BR&gt;(19), 이외에도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 중 1,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성씨는 /나주(羅州)강씨(姜 氏)가 1,336가구에 3,935명 /羅州 노씨(盧 氏)가 600가구에 1,832명/羅州 文 氏가 765가구에 2,537명/남 평 반 씨(潘 氏)가 676가구에 2,227명/ 羅州배씨(裵 氏)가 1,177가구에 3,789명/ 금성(錦 城) 배씨(裵 氏)가 377가구에 1,146명/ 나주(羅州)백씨(白 氏)가 506가구에 1,536명/ 나주(羅州)서씨(徐 氏)가 831가구에 2,617명/나주(羅州)성씨(成 氏)가 537가구에 1,698명/ 나주(羅州)손씨(孫 氏)513가구에 1,657명/나주(羅州)송씨(宋 氏)가 1,247가구에 4,014명/나주(羅州)신씨(申 氏)가 683가구에 2,148명/나주(羅州)엄씨(嚴 氏)가 546가구에 1,690명/ 나주(羅州)염 씨(鹽 氏)가 564가구에 1,830명/ 나주(羅州)유 씨(柳 氏)353가구에 1,153명/ 남 평(南 平) 윤씨(尹 氏)가 338가구에 1,076명/ 나주(羅州)전씨(全 氏)가 1,629가구에 5,167명/나주(羅州)조씨(趙 氏)가 1,680가구에 5,502명/ 남 평(南 平)조씨(曺 氏)491가구에 1,398명/나주(羅州)주씨(朱 氏)581가구에 1,931명/ 나주(羅州)차씨(車 氏)377가구에 377가구에 1,235명/나주(羅州)차씨(車 氏)649가구에 2,103명/나주(羅州)한씨(韓 氏)774가구에 2,572명/나주(羅州)홍씨(洪 氏)895가구에 2,861명/ 나주(羅州)황씨(黃 氏)512가구에 1,579명 등으로 나타나 있다. &lt;BR&gt;&lt;BR&gt;☞ ※ . 참고 문헌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정씨 족보(族譜)(본관별) &lt;BR&gt;민족문화(民族文化) 대백과 사전/나주문화연구원 자료 등 다수 &lt;BR&gt;김 관봉 의 신구 관혼상제. 황화문화원 자료 &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나의호는 봉암</category>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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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9 Jun 2013 16:03:2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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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본 북큐수의 온천여행(후쿠오카, 뱃부, 아소, 구마모토)</title>
      <link>https://nk-ele.tistory.com/25</link>
      <description>&lt;P&gt;日本북큐슈 溫泉 旅行記(후쿠오카,뱃부,아소,구마모토) &lt;BR&gt;旅行 日程: 2007년 2월25~2007년 2월28일(3박 4일) &lt;BR&gt;旅行 團體 : 鳳凰 초등학교 37 회모임 (卒業 45주년) &lt;BR&gt;* 동행여행자 :최 창 은씨 부부-전북환주군 삼례 읍 석전 리143-2 (국제관광여행사대표) &lt;BR&gt;국제관광 전화:063-291-3434/011-659-4964/김 정옥 씨부부 (이상 4명 합류하였음) &lt;BR&gt;&lt;BR&gt;주간 旅行社 : (주) 모두여행사 “정 옥녀” T:225-0210 &lt;BR&gt;光州 -釜山 : 천사관광 “강 승표”062-514-1004 &lt;BR&gt;釜山-日本-釜山: 뉴-카멜리아호 (시속45km/22,000t급) &lt;BR&gt;釜山-光州:소리투어(조이트래불)최 금호:T, 018-621-8770 &lt;BR&gt;日本내 觀光버스: 35인승 Y K C -352 &lt;BR&gt;案內 現地 가이드: 光州 두 암 동 出生 32세 “나 형 권” &lt;BR&gt;旅行 經費 : 1인 여행비399,000원(동반 시1인 회비 에서지원) &lt;BR&gt;* 불참석 회원 4명에게 지원금 50 % 환불 協議 &lt;BR&gt;* 당 여행 회비는 전 회원 공희 10만원 거출키로 합의 &lt;BR&gt;&lt;BR&gt;산업화된 환경과 옛것이 함께 공존하며 日政 治下에 자기네 文化를 접목도 많이 하였고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깝고 氣候 역시 크게 차이가 없으며 政治,경제, 文化 적으로 밀접한 關係를 가지고 있는 나라 日本을 관광하기로 선택한 것은 3~4년 전부터 會議가 있을 때마다 논의가 되어 당초는 금강산 觀光으로 거론 이 되어 매년 10만원씩을 旅行 會費로 별도 거출 하였으나 최근 경색 되고 있는 금강산 觀光에 대한 여론도 종합하고 몇 회원의 미납 한계가 엇갈려 있는 터에 그래도 다수 會員들의 의견이 비용이 적게 드는 가까운 日本 旅行을 추천 끝에 費用의 절감을 위한“ 3 안”을 선택 하게 된 旅行이다. &lt;BR&gt;18명의 회원 중 해외 출장으로 어려움이 있는 손 행칠 회원 탈회의 의사를 표한 박 병 준 회원을 빼면 16명의 회원이 함께해야 하나 “홍 석준“박 응 규”최 종구“ 회원이 家庭사정과 健康상 문제 로 참석치 못한 “김 기송” 會員 모두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 부부참석을 원칙으로 50 %를會費에서 지원하자는 결의 가 되어 23 명 의 會員이 다녀온 3박 4일의 旅程을 기록 하고 저 한다. 2006년 현재 인구 1억2천 6백만에 한반도의 1.7 배인 약 38만 평방km2에 순수한 日本 민족 98 %이며 일본만이 특유한 신도 종교 가 약 800여 종류가 있으며 그중에 “신도”와 佛敎“ 기독교”가 우이를 차지하는 日本 남북으로 2,800 km2에 걸 처 4개의 주요 큰 섬과 4,000 여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로 혼 슈 .시카고 ,규슈 .홋가 이도, 중 규슈 로 선택한 것은 지금의 季節에 적합한 최 남쪽에 있는 곳으로 적격 이였고 4개의 추천 상품 중 택일된 곳으로 10명의 남자회원과 11 명의 여성회원 그리고 효도가 지극한 영렬 회원 의 母親 동칠 회원의 딸이 합류되어 23명의 會員이 여행 일정에 함께했으나 고향 쪽에서 12명 서울에서 11명 이 나누 어 저 출발하다보니 결국 광주~부산, 서울~부산 의 비용의 추가가 비용의 증가로 회비지출이 늘어난 가운데 부지런하게 추진에 노력해준 김 형 년 총무의 노력과 협조해준 회원님들의 덕택에 무사 하고 즐거운 旅行이 되었음을 깊이 감사드리며 기행문의 장을 피력 하고 저 한다. &lt;BR&gt;서기 2007년 03월 4일 여행 에 함께해온 정 찬 열 올림 &lt;BR&gt;&lt;BR&gt;서기 2007년 2월 25일 (여행 첫째 날) &lt;BR&gt;광주의 봉선 동 아파트 앞 3거리에서 천사관광에 집사람과 함께 탑승한 시간 은 오전 11:30분 경 45 인승 천사 관광(觀光) 버스에는 낮 모른 여행(旅行)객이 대부분의 앞좌석을 자리하고 있고 鳳凰에서 탑승한 우리 회원대부분이 뒤쪽 자리를 하고 있어 우리 부부역시 뒤쪽 의 빈 의자를 자리하고 旅行 정출발지인 광주 역 광장에 12시가 넘어 도착하니 또 다른 4명의 여행객과 모두 여행사 정 옥녀 사장을 만날 수가 있었다. &lt;BR&gt;12시 20분 광주역(光州驛)을 출발한 觀光버스가 광주 시내를 벗어 날쯤 미모의 30대 아가씨가 마이크를 잡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소리투어 회사 안내가이드로 낮 서른 60대 초반의 앞자리에 관광객 들이 소리투어 여행객으로 나주 문평 에서 30 여명 넘어서였고 다음 소개를 받고나온 거의 같은 또래의 몸이 여릿한 아가씨는 日本 현지 가이드라며 本人 소개를 하였고 우리 일행에 까지도 소리투어라고 적인 가슴 뺏지을 나누어주며 日本에서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소리투어로 모든 것을 함께 해달라는 부탁이 수적 의로 열세인 우리가 그만 더부살이 출국 여행이 되고만 것이다. &lt;BR&gt;남해 고속도로를 따라 남강휴게소에서 각자 가 알아서하는 점심과 휴식시간을 취하고 2~30여분 후 출발하는 버스는 춤추고 노래하는 한국 전형의 관광차놀이로 이여지고 釜山항 國際旅客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 16시 30분경 터미널 2층 대기실에 대기 하는 동안 17시 50분에 도착한다는 KT-Ｘ호로 서울에서 14시30 분에 출발한 11명의 서울 의 우리 팀은 보다 늦은 18시 30분경 어느덧 釜山-日本을 오가는 뉴-카멜리아호에 탑승객이 여유롭게 빠저 나간 후의時間 이였고 出國 절차를 마친 후 30여분 대합실내 면세점을 돌아보고 탑승 후 23시에야 출항하는 500여명을 넘게 실은 2만2천 t급 대형선박에 우리 一行만의 별도 다인 실을 배정받지 못한 불편을 감수해야 했으나 마침 나의 연락 끝에 우리 會員들의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찾아 와준 釜山에 사는 손행칠 會員 의 귀 뜸에 따라 선박에 탑승 후 선내의 사무장과 가이드의 협조를 받아 여자 분들이 합숙소310호 우리 남자회원들이 합숙소인 304호를 別途 배정을 받아 우리 에게 旅行을 대비한 토의를 갖는 시간과 불편 없는 출항 길에 선내의 저녁식사를 방송의 案內에 따라 하고는 거대한 선박동체는 어둠과 파도를 가리며 태평양 바다위를 떠나는 첫날의 旅行은 잠자리로 이어지며 선박의 엔진소리와 부디치는 파도소리와 동체 의흔들림을 설치는 자장가 삼아 시작 되고 있는 것이다. &lt;BR&gt;&lt;BR&gt;서기 2007年 02月 26日 (旅行 둘째 날) &lt;BR&gt;새벽 6시40분 아직 여명이 트지는 않았지만 日本 의“하카다항”부두의 밝은 조명(照明)의 불빛에 우리가 타고 유람선이 정박해 있음을 직감 할수 있다. &lt;BR&gt;저마다 일찍 일어나 선내를 맴도는가하면 20여명이 이용하기에는 비좁은 선내 샤워 시설(施設)에 욕탕 의 샤워기로 머리를 감고 우린 남녀의 서로 다른 客室을 이용한 탓으로 아침준비며 갈아입는 옷가지를 가족을 찾아 여념 하는 동안 혼잡을 피하기 위해 여행 그룹 별로 食事時間 案內 의 방송이 들려 우리 一行의조반(早飯)은 07시 30분에야 시작 되었고 푹 퍼진 넓은 국그릇에 두세 가지의 반찬은 그래도 우리 입맛에 맞춘 탓인지 누구하나 불평 없는 아침식사 에 사전에 별도 준비한 김치며 김은 부족 한 입맛을 맞추는 데는 인기(人氣)의 산물 로 아침 식사에 곁들이는 한국산(韓國産) 소주 한잔은 여행 이였기 에 있을 수 있는 朝飯 飯酒(조반 반주) 로이여 지는 時間이였다. &lt;BR&gt;아직 은 入國수속 을 시작도 않 하는데 무엇이 급한지 먼저 조반타임을 끝낸 많은 사람들은 조급한 심정으로 크지 않는 로비에 열지여 수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보면서 이곳 日本이라는 나라는 자기들 나라의 표준 데로 시간에 억매이지 않고 정상 출근시간(出勤時間)에 맞추어 입출국 의 수속을 하기 때문에 선박(船舶)편 旅行역시 어제 밤 부산항에서 늦게 출발 하고 船內서 時間에 맞추어 조반까지 의 스케줄이 이여 지는 것이란다. &lt;BR&gt;&lt;BR&gt;크게 까다롭지 않고 소란 없는 입국절차가 30여분 하카다 항 대합실에 내려가니 덥수룩한 머리와 헌칠한 30대의 젊은 사내가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었고 23명의 일행이 거의 다모이고 다른 일행 역시 저마다 안내자 의 지시로 거의 다 대합실을 나가는데 4명 의 또 다른 인원이 와야 한 다기에 우린 우리가 탑승할 버스를 요구했고 4~50 여 미터 떨어진 주차장 대기한 로 변 에 초록색 외면에 YKC 글자가 크게 박힌 40인승 버스를 안내 받아 그곳으로 이동했고 5~60 대쯤으로 보이는 운전기사님 이 어디선가 우리를 발견 수래 차처럼 끌고 온 우리의 가방 짐 들을 짐칸에 실고 버스에 올라 자리하고 기다리기를 10여분 배에서 내리는 旅行객이 저마다 갈길 찾아 한산해질 무렵에야 낮 모른4~50대의 두 부부를 동반하며 가이드가 버스에 올라 27명의 인원점검이 끝나고서야 버스는 “하카다항” 을 빠 저 나왔다. 주위 환경이 낮 설지 않음은 국내서 자주 보는 현대라는 글자가 붙은 콘테 이너며 건물 생김 세나 주위 환경들이 우리 한국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시절 일본 건축들을 한국에 접목해 놓은 것도 그 한축이라 생각한다. &lt;BR&gt;마이크를 잡고 자기소개(自己紹介) 을 하는 가이드는 우리 고장 光州의 두 암동에서 태어났고 부모님도 그곳에 사신다는 32세의 유학생 (留學生) “나 현 권“이란다 &lt;BR&gt;일찍 日本에서 살아온 경험으로 한때는 韓國에서 일본어 학원(日本語 學院) 강사로 일도하다 이렇게 가이드로 안내자로 일하기 시작한 것이 2년 반이 되었다며 전라도 사투리가 포근함을 더해주 며 일본의 역사 地理 그리고 日本 政治 경제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가 저야 하는 가이드의 이 얘기를 들의 며 그제 까지 관광객을 떠나보내고 우리가 온다는 연락과 우리의 案內를 해달라는 여행사의 뜻으로 하루를 더 기다려 오늘 우리를 만나게 되었으며 우선 연령상으로나 지역 出身이 호남이라서 2박3일의 함께하는 안내(案內)가 안도 된다는 것이란다. 우리나라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는 아담하고 정렬함이 돕 보이는 건물들 이곳이 규슈(구주)日本말 히카타라 하는 이 도시는 光州와 비슷한 인구120만 의 도시로 차창 밖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국처럼 묘지가 없는 대신 검물 옆이나 농촌 주택가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는 묘비 석 (납골당) 예전에는 사람이 죽의면 절 .안방 납골 묘 등 세 곳에 신을 모시다가 거의가 지금은 위패만 집에 두고 화장한 시신을 눈에 보이는 저 납골묘에 안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전개되는 아담한 농촌주택은 대부분이 2층 주택이며 그리 높지 않으며 층고가 낮은 아파트 들 이나 큰 고층건물 이 없는 것은 1년 에 평균 4000 여 번 씩 오는 크고 작은 지진(地震) 때문이란다. &lt;BR&gt;얼마를 달렸을까 차창 밖 좌측시야에 들어오는 공항은“후쿠오카공항”이란다. &lt;BR&gt;공항 건물(空港 建物) 주차장에는 낮잠 자듯 수많은 차량이 주차 되있는 것을 뒤로하고 이곳 日本은 차량은 많지만 소형 차량들이 대다수고 실리만을 중시하는 日本人들 은 주중에는 거의 운행(運行)을 자재 하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 수단으로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그 또한 이유가 이용하는 도로 곳곳 마다 유료통행료가 대부분이고 통행(通行)료 비싸기가 만만치 않아 택시의 기본료가 590엔(한화 약4오백 원)그래서인지 영업용(營業用) 택시가 그리 흔치 않음을 볼수 있다. 日本에는 차량의 번호판이4종류가 있는데 600cc이하 경차는 노란색 바탕에 하얀색 번호판은 600cc 이상 이며 보통 영업용車輛은 영업용 그리고 600cc이하의 영업용은 검은 색 번호판으로 구분한단다. &lt;BR&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025E054C51B4274B28&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actualwidth=&quot;950&quot; exif=&quot;{}&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950&quot;  id=&quot;A_025E054C51B4274B282203&quot;/&gt;&lt;/P&gt;
&lt;P&gt;&lt;BR&gt;차량이 얼마를 달렸을까 08시 40분경 가이드의 案內를 따라 우리 일행이 주차장에 내려 편도 1차로의 포장된 노변 길을 따라 250여 m좁다란 인도 옆 가로 에는 선물가게 가 우리의 시선을 끌지만 이곳 日本의 가게들은 대부분 9시가 넘어서야 가게 문을 여는 탓이란다. &lt;BR&gt;이곳저곳에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릴 듯 매화꽃이 우리나라보다 기온의 포근함을 안내하고 크고 작은 선물가게와 잡화전이 늘어선 노변을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니 콘도레이(烏居)를 만나 게 되고 그 앞에 소가 앉아 있는 동상을 보며 가이드의 설명인즉 이소가 끄는 마차에 스가 하라 노미 치 자네”유체가 실려 나가는 데 이우마차가 이곳에서 갑자기 멈추어 꼼짝 달 삭을 안 해서 그 소가죽은 후 그 소를 이곳에 묻었다는 태재부 천만궁(太宰府天滿宮,다자이후 텐만구) : 시인이자 학자이며 철학자였던 관원도진(菅原道眞: 스가와라노미치자네, 845~903)를 학문의 신으로 모신 신사로 왕의 친애를 받아 일찍 높은 벼슬 지위에 올라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못이 겨 갑자기 다자이후의 관리로 좌천이 되어 귀향을 오게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다자이후에서 운명(運命)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죽는 날 매화나무가 교토와 규슈등지에서 날아와 하룻밤 세에 육천 그루의 꽃을 피웠다는 전설(傳說) 속에 그를 좌천시키는데 가담한 人物들이 모두 이유를 알 수 없는 병고(病苦)로 죽게 되어 그를 모시는“태제 부” 천만궁을 짓게 되었으며 또한 이동상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다이 코 바 시”라고 불리 운다. 이 다리를 건너면 현세와 내세를 연결한다고 해서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觀光) 객을 많이 만나게 된단다. 오늘날까지 본전 (중요 문화재) 앞에 있는 매화 (도비우매:飛梅)라고 불 리우는 매화나무가 바로 이 전설을 대변하고 있다. 이곳의 다리 밑 연못에는 거대한 거북이와 자라가 살고 있고 큰 잉어들이 유유히 노는 모습이 여유롭다. &lt;BR&gt;안쪽에 자리한 이 건물은 희 노 끼라는 나무로 지붕을 하였으며 더욱 유명 한 것은 평성 14년 (1960년대) 火災로 인해 재건축한 건물이란다. 우리일행이 이곳 본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각자 선물가게가 즐비한 거리를 따라 이동을 서두르며 주차장에 대기한 버스에 탑승 한 시각 오전 10시를 알리는 시간이다. &lt;BR&gt;다음 목적지 구마모토로 이동하는 차 속에서 가이드는 日本 전채에는 한국의 道에 준하는 현이 43개 가 있고 이곳 규슈에는 8개의 현이 있으며 일본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않되 는 것은 집값 땅값이 너무 비싸고 물가 역시 비싸기 때문에 대부분 맛 벌이 부부가 대다수란다. 달리는 차창 가에 곧고 푸르게 진행되는 푸른 숲은 곧고 성장속도가 빠른 삼나무에 지진에 강하고 도움이 되는 대나무 밭이 많다고 한다. 삼나무는 성장속도가 빠르고 곧으나 재질이 약하고 꽃이 필 때에는 꽃가루가 많이 날려 많이는 植 堤(식재) 되었으나 실패작의 하나라고 한다. 한참을 달리는 버스는 인터체인지에 접하고 곧바로 톨게이트 에 접어드는 것으로 편도 2차선이 전개 되는 것으로 아마 고속 도로 &lt;BR&gt;(高速 道路)인 듯싶다. 차 창밖으로 들어오는 아담한 건물들 과 농지전답(農地田畓)을 생각 없이 보노라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웬 지 농촌주택(農村住宅) 대부분 2층집이 대부분이며 습기가 많은 기후 조건(氣候 條件) 때문에 전통 농촌가옥(農村家屋) 대부분이 1층은 주로 주방과 거실로 사용하고 2층은 주로 침실로 사용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단다. 또한 달리는 차량역시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운전석이 우측에 있어 당연히 좌측 차선을 이용하는 통행방법에 이곳 고속도로에는 125cc 이상의 오토바이는 고속도로를 허용하기에 이따금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볼 수가 있었다. 전개되는 가로풍경을 눈요기삼아 11시가 되어 도착한곳은 규슈 地方 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며 일본의 3대 城 의 하나인 구마모토 성 (能本城:능 본성)은 구마모토 현의 現廳 으로 1607년 개축(改築) 된 성의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가또이요마사가 7년에 걸 처 완성한 일본에서 손꼽히는 성이며 정치(政治)경제(經濟), 중심로 덴쇼 16年 (1588년) 가토 기요마사 북반구 19만 5천성의 영주로써 약 오백년 전부터 城 이 있는 도시(都市) 로 발전해 왔으며 현재 인구는 약 63만 명으로 흔히 불의 도시로 불리 우며 두 가지 모양의 돌담으로 불리 우는 경사가 완만한 구마모토 능본성 (能本城) 돌담과 경사가 심해서 세월(歲月) 이 흐른 뒤에 증축된 것을 알 수 있고 또 하나의 돌담축조는 소화 35년 에 외각을 복원한 지상6층 지하 1층 의 돌담 축조위에 높이가 약 30m 에 이르는 건물(建物) 이며 입구 쪽 우측에 서있는 소천수각 은 지하(地下) 1층에 地上4층 이 19m나 되는 建物 에 내부에는 가토가 호소카와가 서남전쟁(西南 戰爭) (메이지 10년 :1877년)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광장(廣場) 우측 큰 기와 건물 을 둘러쌓여 철재 빔으로 복원 공사(復原 工事)를 하고 있는 것은 “혼 마루어전” 오희로마 (큰방)의로 축성 400년 이 되는 2007년 에 복원 완성(完成) 될 공사가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lt;BR&gt;우리가 올라가본 대천수각에서 100여 m 떨어 저 모양이 비슷한 천수 각은 “우 토 야구라” (宇土櫓 )는 多層 애구라 망 루(望樓) 란 다. &lt;BR&gt;지하1층 지상5층 규모 로 다른 성곽에 비하면 천수에 필적할만한 곳으로 이곳이 난공불락(難攻 不落) 의 거대한 요 세 엿 음을 알 수 있는 지역이란다. &lt;BR&gt;구마모토 능본 성(能本城)을 관람하고 나오는 시각 12시 30분 하늘이 맑고 춥지 않는 좋은 날씨라며 감탄스런 말을 하는 안내 가이드 아무튼 유럽의 5개국 동남아를 두 차례 중국을 3~4번 이번 日本 여행을 찾아 온 나에게는 일기가 좋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이것도 多幸 으로 기분 좋은 것인 듯싶다. &lt;BR&gt;능본성 을 나와 5분여 그리 멀지 않는 현지 의 중식식당(中式 食堂) 1층으로 아담하지만 가지런한 태 이불 이 줄 지여 정연하고 그리 높지 않는 칸막이가 旅行客(여행객) 들의 편 가름이라도 하듯 분주 희 써 빙에 바쁜 아가씨들이 그리 많지 않는 식사 객 들 사이로 우리 일행도 한쪽에 자리하고 120여 가지 뷔 폐가 입맛 따라 찾는 식객을 유혹하는 중식 시간 준비 해간 소주잔 은 더없는 맛이라고 할까? 맛을 보아야한다고 한가지씩만 소반에 가 저와 배불리 먹고 잠시의 휴 식 중 직업(職業) 의식에 빼놓을 수 없는 日本 의 전력설비(電力 設備)는 한국이나 다름없는 C P 전주(電柱) 에 6600 볼트의 1차 배전전압 설비 가는 곳 마다 당연히 100V 2차 전압 그리고 인입구에 붙어있는 전력량계(電力 量 改) (계량기)부착 內容 이나 생김 세며 인입구 D V 전선 에 주상에 압착 퓨즈 등 우리나라가 日本 의 설비(設備)를 답습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현재(現在) 우리나라는 동력 380V 에 전등설비 220V 로 배전설비 가 훨신 잘되어있는 것으로 내심 생각이드는 것은 발전하는 한국의 기술력 이라고 아니 선두주자로의 질주라고 말하고 싶다. &lt;BR&gt;이곳 日本 에는 우리나라에 연구 과 재로 시험단계에 있는“학 조바루”( 지열발전소:地熱發電所)가 기당 5만 KW 급 3기 로 15만 KW 가 發電(발전) 중에 있단다, &lt;BR&gt;우리 일행이 점심을 끝내고 다음 여행지를 위해 탑승 한 시각 14시 30분 편도 1차로 의 좁다란 차로를 따라 30여분 산등성이를 따라 가는 차창밖에는 몇 군데 산불이라도 난 듯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이곳 들이 화산(火山)이 타고 있는 활화산의 연기란다. &lt;BR&gt;산등성이 저 멀리 10 여기의 풍력 발전(發電)기가 돌고 있는 곳을 보며 놓칠세라 카메라에 담고 꼬불꼬불 산자락을 맴돌 듯 15시 20분경 1200 M 고지 능선에 다다르니 넓은 주차장이 보이고 가이드의 안내(案內) 마이크는 전광판의 화산 관람 가부를 알리는 판을 보며 오케이란다. 이곳 아소 산은 세계 최대의 칼데라로 이루어진 화산이다. 아소 산의 면적은 380㎢로 동서 18㎞, 남북24㎞, 둘레 128㎞이다. 아소의 폭발은 3천 만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의 모습은 10만 년 전에 있었던 대폭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카다케, 다카다케, 네코다케, 에보시다케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에도 계속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현재에도 높이 1,328㎞, 폭1.1㎞, 깊이 100㎞의 나카다케는 용암을 내뿜고 있어 살아 있는 아소 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아소 산 정상까지는 1959년 세계 최초로 활화산에 설치된 91인승 대형 로프웨이로 올라갈 수 있으며 평소에는 15-20분 간격으로 성수기에는 6-15분 간격으로 운행 되며, 높이 108m의 정상까지 약 4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화산활동이 심상치 않을 때는 관광명소(觀光名所) 는 수시로 변하는 일기와 바람의 방향 에 따라 관광을 허락도 하고 전광판에 NO라고 써 이으면 아쉽게도 이곳 주차장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도 한다는 설명이다. &lt;BR&gt;버스에서 내려 케이 불 카를 타는 곳은 불과 100여M 15시 40분에 밀리지 않는 순서 따라 케이 불 카를 타기전이며 이곳 케이 불 카는 1958년 세계 최초로 활화산에 설치하였으며 이곳 주차장에서화산굴 入口 앞까지 높이 108 M을 4분 만에 연결하는 91 인승 대형 케이 불 카 로 평소에는 15~20분 간격으로 성수기에는 6~15 분 간격으로 운행되며 최근까지 폭발했든 이곳 아소 산은 세계 최대의 칼데라로 이루어진 화산이다. 면적은 380 평방km동서18km남북24km 둘레가 128평방km로 이루 어 저 3천만 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의 모습은 10만 년 전에 있어든 대 폭발로 만들어진 것이란다. 로프웨이 정상에 내려 도보로 3분여 나무 가랫장 울타리가 관광객의 관망소로 대략 300여 m떨어진 거대한 분화구 속에 진청색 물 색깔 에 무럭무럭 피워 오르는 연기가 바람에 흔들려 뚜렷한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분연 과 화산에서 풍기는 硫黃 냄새가 살아 풍기는 곳을 열심 희 카메라네 담고 흐린 듯 차거 운 기온변화에 그리 오래있고 싶지 않은 듯 폭발하고 굳어진 분 능지능선을 따라 설치된 등반길을 따라 15~20여분 걸어서 내려오는 길가에는 붉 으스름한 화산 석과 이따금 듬성듬성 키 낮은 이름 모른 풀포기 나뭇가지를 보면서 주차장(駐車場)에 가차 워 와서야 눈에 띄는 철쭉 군락이 쓸쓸한 돌밭을 감싸주고 고산(高山) 능성이의 차가움이 몸에 와 느껴 저 우리일행은 누가 말 안 해도 모두가 버스에 탑승했고 우리일행을 태운 버스는 다시 왔 든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올라 올 때 뚜렷하지 않는 아소 산 의 신 이 수확한 쌀을 쌓아 두었다는 “고 메 즈 가” 언덕 표고 높이 954m에 위치한 주위의 언덕이 목초로 덮여 아름다운 부채꼴 형태의 동쪽의 산을 내려다보며 17시 경에 도착 한곳은 오늘밤우리의 숙박 지며 온천(溫泉)욕을 할 수 있는 해발 550m에 자리한 곳 멀리서보면 에스키모의 집을 연상 하게하는 돔형 막사가 즐비하게 위치하고 3층 정도 조금 큰 건물과 요란스런 장식전구와 주차장이 있는 아소 온천(阿蘇溫泉) 관광지 저마다 관광가방을 끌고 안으로 들어서니 案內人과 가이드의 日本어 로 주고 받드니 건물 밖 돔 막사 앞에서 배정된 숙소인 돔 현 막사를 안내받아 바로 앞에 대기 중인 25인승의 두 대의 셔 틀 버스에 나누어 타고 3~4분후 도착한 B단지 우리부부가 투숙할 292호이다. &lt;BR&gt;출입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니 3개 의 싱글 침대가 가지런 희 놓여있고 탁자며 TV,쇼 파 그리 고 작지만 샤워실과 화장실 까지 딸려있는 호텔과 다를 바 없는 시설 이였고 우리 일행이 너도나도 웃 움을 자아낸 것은 다음 스 케 줄에 있는 온천욕을 하기위해 숙소에 준비된 일본식(日本式) 까 운 만을 입고 셔틀버스를 타고 우리가 처음 내려 안내받은 건물에 있는 곳으로 오라하니 너도 나도 없이 처음대하는 까 운 걸이에 저마다 속옷을 입은 사람 안내대로 입은 사람 서로가 웃음을 자아내며 순회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온천에 들르니 뜨거운 열기와 색다른 여러 개의 노천탕 뜨거운 40여도정도의 유황냄새가 싫지 않는 이국에서나 처음 만나본 특이한 온천(溫泉)욕에 1시간 30여분을 즐기고 온천탕에 연결된 건물 2층의 뷔폐 식당에 서 가지 수많은 저녁식사를 즐기고 20시가 다되어 우린서로 숙소로 돌아가는데 한사코 온천욕을 더하자는 집사람의 요청 따라 한 시간 30분을 약속으로 서로 다른 탕을 찾아 들어갔고 저녁 전에도 그랬지만 이곳 온천탕에 내부관리(온도점검/내부정리 하는 남탕에 상관없이 마스크만을 쓴 일본아가시가 스스럼없이 드나들며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낮 설은 풍경은 우리일행의 여담거리였다. &lt;BR&gt;약속된 시간(時間)내에 샤워를 끝내고 대기실에 이곳저곳을 돌다보니 한쪽에 즐비한 전동(電動)의자 안마기가 여러 대 놓여 실험삼아 투입구에 100엔을 너 의니 조작 버튼 따라 시원스런 안마에 주물음이 더 없이 좋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日本 하면 전자제품의 선두주자(先頭走者)에 더욱이 의자형 안마기 하면 세계적으로 수출을 많이 하는 때문이기도 한다. &lt;BR&gt;잠시 후 성희 친구 부인과 함께한 집사람 모두 만족을 연발하며 두 차래 30여분을 즐기며 300엔 으로 구입한 시원한 생맥주 또한 샤워후의 속 풀이랄까? 피로와 갈증을 풀고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찾아 tu틀 버스를 타고 숙소를 찾아 일본여행지의 첫날밤도 하루 觀光의 피로 속에 잠이 든 것이다. &lt;BR&gt;&lt;BR&gt;2007년 02월 27일 (여행 세 째 날) 火曜日 &lt;BR&gt;&lt;BR&gt;돔 막사의 하룻밤도 06時 의 모닝콜에 기상을 하여 하루 여행 의 시작을 위해여장을 준비하고 여행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어두운 하늘빛도 아닌데 밖에는 빗방울이 염려 할 정도 는 아닌 듯싶게 비가 나리고 있다. &lt;BR&gt;07시경 순회(巡廻)하는 셔틀 버스를 타고 어제 저녁을 먹었든 식당으로 모여 뷔폐식 조반으로 식사를 하고 아직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이동하면 개 이는 날씨란다. 주차장에서 보는 저 멀리 산언덕에는 희연 화산연기가 이색적으로 피어오름을 보면서 08시경 우리일행은 호텔앞 주차장에 대기한 버스에 각자의 가방을 화물칸에 넣어두고 해발 500여m의 아소 온천 숙박 지를 뒤로하고 좌우에 전개되는 우리나라 한 단지(약900평) 보다는 절반정도 보이지만 틀에 박희지 않는 대체로 깨끔하게 정비된 논밭 전경을 접하면서 좌측의 먼 산 중턱을 끼고 뛰를 두른 듯 안개처럼 화산연기가 감싸 도는 전경을 보면서 마주 오는 큰 차량 들이 스칠 때마다 위험하게만 느껴지는 꼬불꼬불 곡예 산길을 따라 가끔씩 자위대의 군용 차량 과 관광버스만이 이따금 스칠 뿐 아무리 달리고 주위를 살펴도 날짐승이나 들짐승 그렇다고 양떼나 염소도 있는 것이 아닌 계속되는 草原의 능지 나무숲은 거의 없고 초원 같은 능지를 덮어 도는 산길 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안내가이드의 유모어중 에는 “남자(男子) 의 성(性) 과 불(火)” 에 빗대는 유모 어 을 옮기자면 &lt;BR&gt;10대를 번개 불에 빗대는 것은 언제 일어났다 꺼진지 모른다./ 20 대는 성냥불: 문지르기만 하면 불이 붙기 때문이며 / 30 대는 장작 불: 화력 이세기 때문이며 / 40대는 화롯불: 뒤적거릴수록 오래 탄다. / 50 대 : 담배 불-빨아야 잘 타기 때문이며 / 60 대 :촛불-불기만 해도 꺼진다. / 70 대 : 반딧불-불도 아닌 것이 타지도 않는다. 라는 끼 있는 유모 어에 앞좌석의 사모님들의 배꼽 잡는 웃음 속에 흥이라도 돋은 냥 이어지는 “ 여자(女子)의 성(性)과 과실(果實)” 에 비유하는 내용을 옮기 자면 / 10 대 : 호 도-까기도 힘들고 먹을 것도 없다. / 20 대 :밤 -구어서 먹고 삶아서 먹고 생으로도 먹는다. /30 대 : 귤-어디서나 까기도 먹기도 쉽다./ 40 대 : 수박 -칼 만대면 저절로 벌어진다./ 50대 : 석류-저절로 벌어 저 보기는 좋으나 신맛에 먹기 힘들다./ 60대 : 모과 -물 도 없고 맛도 없는 것이 떨떠름 하기만하다./ 70 대 : 토마토 - 과일도 아닌 것이 과일 인척한다. &lt;BR&gt;&lt;BR&gt;유모 어 감각이 뛰어난 타고난 가이드의 체질이라고 할까 꼬불꼬불 차도의 산길은 꼭 제주도 한라산 횡단 길이초목만 널려있는 초원을 가는 냥 착각 스 런 2시간 10분 을 달려 저 멀리 아래쪽 산중턱에 한눈에 들어오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며 열대림 사이로 온천 연기가 곳곳에 피어오르는 이곳이 온천의 도시 오이타 현 벳 부 시 인구는 12만 6,854명(2003년)이다. &lt;BR&gt;&lt;BR&gt;&lt;BR&gt;인구밀도는 1,013.78명/㎢이다.&amp;nbsp;시가지는 화산성 선상지(火山性扇狀地)와 그 기슭에 이어지는 충적지에 전개되며, 주위는 쓰루미산[鶴見山] ·다카사키산[高崎山] 등 화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시(市)의 남쪽에 벳푸 등 4개, 북쪽에 가메카와[龜川] 등 4개의 온천이 있어, 이른바 벳푸팔탕[別府八湯]이라는 온천고을을 이룬다. 이들 중, 벳푸온천이 천량(泉量)·교통·지형 등 조건이 좋아 가장 번창하기 때문에 온천고을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이 되었다. 이곳 온천수는 2848개소 로 세계 제일이며 용출량(用出量)은 1일 13만 6571 칼로리로 日本 에서도 제일 유명 한 곳이란다. 벳 부 온천은 “벳 부”묘 반“ 하마와키”시바세키“ 칸나와” 칸카이지“호리타” 가메가와“등 8개의 온천(溫泉) 으로 이루어 저 있으나 우리의 목적지는 우미(海)지옥 혹은 바다지옥 으로 황산 철 때문에 바다색 과 같은 청색 푸른 바다 (우미:海)지옥 깊이는 120 m에 98도c나 되는 열탕으로 5분 만에 달걀이 반숙되어 함께 동행 한 전주에 최 사장의 배려로 근처 가까운 곳에 20여분의 足浴(족 욕) 체험 시간에는 반숙 달걀을 먹어보기도 한 時間이였다. &lt;BR&gt;바다지옥의 관광을 끝내고 10여분 벳부 의 시내를 이동하여 도착 한 시각 11시 40분경 한국(韓國)인이 운영한다는 면세점 코너 의 주차장에 주차 후 모두 면세점 안으로 들어가니 한국 의 쇼핑 점 에나 온 듯 점원들은 한국의 아가씨들과 아르바이트 한다는 유학생이 대부분이여서 어려움 없는 쇼핑을 할 수가 있었고 태평양 전쟁 시세계 에서도 유일하게 인간 생체 실험으로 의약품 발달이 앞서 간다는 가이드 의 안내 탓인지 일행모두가 의약품 코너가 성황 이였다. 세상은 넓고도 좁은 것 전자제품코너에서 대화를 하다 보니 광주에 진월동이 집이며 양 성식 친구의 아들 현수의 친구 장흥이 고향이라는 김 민 수 라는 유학생을 만나 더 많은 이야기도 논하고 내가 구하려 했든 일본주화(日本 鑄貨) 수집에 숙제를 풀고 12시 20분경 저마다 쇼핑을 끝내고 차량에 탑승 하고 이동한 것은 10여 분후 수많은 뷔폐 음식점 이제는 우리일행도 뷔 폐 음식에 능동적으로 접하면서 가이드가 써 비스로 전해주는 맥주잔에 더욱 즐거운 점심시간으로 이어졌다. &lt;BR&gt;배불리 먹은 점심시간도 14시 경 다시 차량에 올라 10여분을 바닷가 쪽으로 도로를 따라 달리더니 바닷가에 그리 멀지 않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큰 도로위로 지나는 육교를 건너 그리 멀지 않는 산중턱에 자리한 대분시(大分市) 서쪽 해발 628 m 에 자리한 약1200 여 마리의 일본산 야생 원숭이 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관찰코스로 만들어 놓은 고기산 自然 動物園 (자연 동물원)벳푸시[別府市]와 오이타시[大分市] 경계에 있는 다카사키야마산[高崎山, 해발고도 628m]에 있다.&amp;nbsp;이곳에서는 에도시대부터 야생 원숭이가 살았다고 하며, 공원은 1952년 11월 3월에 개장하였다. 이곳에서는&amp;nbsp;원숭이 약 2,000마리가 우두머리의 통솔 하에 약 500 ~ 800마리씩 세 무리로 나뉘어 교대로 산기슭에 있는 절의 경내까지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등,&amp;nbsp;나름의 집단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토대로&amp;nbsp;동물에게도 사회관계나 구조가 있다는 연구 발표가 잇달아 나와서 이곳도&amp;nbsp;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관람료를 지불하고 입구에 들어선 우리에게 가이드의 주지사항은 첫째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 것 .둘째: 만지지 말 것, 셋째: 놀리지 말 것, 넷째: 놀리지 말 것 이라 는 주의사항에 이들 원숭이 들은 두개의 무리로 나누 어 저 매일 지정된 원숭이 집합장소에 모습을 나타내는 야생원숭이로 서로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가장 큰 원숭이 무리부터 먼저 집합장소에 모인 단다. &lt;BR&gt;현지 사육사인 日本人의 안내에 따라 먹이를 주면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어느 한 모성애강한 원숭이는 자기가 낳은 원숭이 세끼가 죽었는데도 1년 6개월을 품에 끼고 다니더라는 것이다 . &lt;BR&gt;원숭이 관람을 끝내고 주차장에 내려는 신깐센 전차선로 밑을 지나 주차장에 버스에 탑승한 시각 15시 30 분 다음 이동지로 가는 차창밖에 오랜만에 내가 궁금 하게하는 바닷가 3~4명의 낚시꾼을 보면 서 案內 자에게 혹시 낚시 재료를 구할 수 있느냐하니 얼마 전 에도 어느觀光객이 찾아 알아 보 아 어도 찾지를 못 했다 는 것이다. &lt;BR&gt;20여분도 채 못 달려 각종 피부병이나 아토피 피부병 무좀 류 마티스 . 근 육 통.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선전하는 “유노하나“ 유황 재배지 재배라기보다는 유황을 채취 한다고 해야 오를까 ? 지하에서 올라오는 독특하고 강력한 코 깃을 매섭게 하는 분출 硫黃을 김처럼 서리 게 하여 채취하는 곳으로 많은 유황관련 관광 상품을 진열 판매하지만 실효성이 크지 않으니 현혹 되지 말라는 가이드의 안내 에 따라 어느 누구도 유황제품은 관람으로 끝내고 10여분 만에 다시 버스에 오르려니 또다시 빗방울이 내린다. &lt;BR&gt;변덕처럼 달라진 기후를 보며 우리가 16시경 에 다다른 오늘의 마지막 관광코스는 “ 희카시야” 폭포 관광을 위 한 질주는 차창밖에 이여 지는 전경은 농촌 들녘을 끼고 가는 좁다란 포장도로를 따라 눈앞에 산이 가로 막고 있는 듯한 산골로 접어들기를 10여분 그리 넓지 않는 한산한 주차장 에는 조그마한 매표소 건물 앞에 안내판과 덜렁하니 자판기 두어 대가 설치되어있고 차내에서 그토록 자랑삼아 애기하든 老 할머님 이 담요로 하반신을 감 싼 채 앉아 웃음을 잃지 않는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였고 주차장에서 내려 깨끗하고 맑은 산골 물을 따라 골짜기로 오르니 80 여m 의 높은 암 벽 위에서 떨어지는 그리 크지 않는 물주기의 폭포 너무 물이 차가워 물고기한 마리 살지 못한다는 폭포수 의 낙차를 배경삼아사진촬영을 하고는 왔든 길을 따라 駐車場으로 내려 왔을 때는 시간이 늦어가는 탓일까 또 다른 관광객은 볼 수없는 아마도 우리가 마지막이면 조금 아래 민가에 사신다는 노년의 할머니 관리를 받고 정부에서 생활비(生活費)를 받는다는 이 할머니도 오늘의 관람을 마감하고 집으로 들어가실 런지 ? 외롭게 홀로 남은 할머님께 부디 건강(健康) 하시고 오래 오래 사시라는 우리 일행의 예의 밝은 인사를 올리고 탑승하니 우리를 태운 버스는 17시가 다되어서야 시내로 향한 이동(移動)이 시작 된지 30여분 산골을 돌아 나와 시내에 들어서니 어수선하지 않는 도로(道路)를 제법 큼직이 보이는 도시는 “낮은 산언덕과 강을 끼고 크고 작은 건물 학교 공업단지(工業 團地)등이 눈에 들어오고 이곳 역시 집단화된 납골당묘석 은 빼놓을 수 없는 전경 이였다. &lt;BR&gt;저물어가는 어둠 속에 서서히 밝혀 저 오는 전등불과 시내 가로등(市內 街路燈)의 밝은 불빛을 야경삼아 1시간 30 여분을 달려 오늘 夕食은 일본 전통 음식을 맛보기위한 일식당(日食堂) 으로 안내 되어 한쪽 룸에 우리일행만을 위한 식사 자리가 준비(準備) 되어있었고 우리 일행 이 자리를 앉자 말자 죠바 의 아까시가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 와 맵고 짭짤한 입맛에 익숙한 우리 일행이 역시 일본 식은 별로인 듯 그러나 한번쯤은 먹어보는 현지 식 이였기에 불평 없는 식사(食事)였 의나 조그마한 따꾸앙 쪼가리 몇 개만 추가해도 가산 요금이 나오는 일본 식을 체험하며 체5~10분여 만에 이동한 숙소는 단체 일반 투숙에 일 천오백 엔을 받는 꾀 높은 숙박료에 잘된 5성급 특급 호텔 인 RIHGA호텔 23층의 높은 건물에 신간센 열차 풀레트 홈과 연결된 이호텔 이층 로비에서 우리일행이 방 배정 카드를 받아보니 우리 일행이 배정받은14층의1401 호부터였고 모두가 배정 받은 호실에 여장을 풀고 마지막 日本 의 밤을 정리하자는 생각 속에 형 년 친구가 투숙한 1410 호에 모여 안주 대신 제대로 끓여 지지도 않는 한국의 컵라면 두어 개에 우리소주를 돌리며 담소를 나누다 별 뾰족한 묘안이 없어 20 여분 후 각자의 객실로 이동 하려다. 나를 포함 몇 친구의 의견 끝에 재 희/오환/동칠/석동 5명은 가벼운 차림 의로 호텔 밖을 나갔고 누구나 이곳에 낮 설은 우리는 그리 멀지 않고 호텔과 연결되어있는 신간센 열차역사로 네온불빛야경을 관망삼아 돌아나가다 골목의 선술집이라도 들려 보자는 의견 끝에 점포와 술집들이 보이는 골목 의로 들어갔었고 벌써 문을 닫은 곳이 대부분인 골목에서 나이어린 젊은이가 주인 인 듯한 선술집 비좁은 공간에 우리가 앉아야할 의자도 없는 말 그대로의 선술집 이란다. &lt;BR&gt;서투른 日本語 영어 등까지 동원하여 주인과 뜻이 전달되어 일본의 정통 주 우리나라 종이컵 크기의 유리컵 한잔에 300엔 하는 정종 한잔씩을 주문하고 별도의 아부래 기 같은 한점 집고나면 부족한120엔의 안주에 입을 맞추고 우리는 다시거리로 나와 행여 유익한 꺼리가 없을까 생각하다 24시 마트를 들려 내가 남은 200엔으로 현지 술2병과 쏘시지를 사들고 제법 쌀쌀한 밤길을 돌아 인적이 드물어가는 신간센 歷史驛을 지나 호텔1410호에 벨을 눌러도 대답 이 없어 우린한쪽 코너 호텔 물치 창고 에 마트에서 구입한 술과 안주로2~30여분 담소를 나누고 각자 침실로 돌아가는 RIHGA HOTTL 에서의 이틀째의 밤은 새벽 1시30분경 이였다. &lt;BR&gt;2007년 2월 28 일 (여 행 네 째 날) 수 요 일 &lt;BR&gt;모닝콜 06:00평소의 습관 탓에 다섯 시가 조금 못되어 잠이 깨어 버릇처럼 화장실고 샤워를 하고 는 낙서처럼 기록한 여행기(旅行記)를 준비 하느라 아침 시간이 아쉬움 속에 호텔에서 제공되는 뷔페식 조반을 들고 오늘이 여행스케줄의 마지막 행선을 위한 08시경 호텔 2층 로비에 다모였고 그래도 즐거운 여행의 표시인지 다시 왔으면 하는 농담어린 이애 기도 흘러나와 회장인 나로써 그리고 이여행의 안내자(案內者)로 써 다소는 안도함이 앞 설뿐이다. 20여 분후 고속도로에 접어 들었 의나 한 결 같이 서두르지 않는 버스기사 아니 주행하는 모든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거나 추월을 서두르는 것을 보기 힘든 우리 국민이 많이 본받아야할 점이라고나 할까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논 밭 산야 속으로 지나는 송전(送電) 철탑 사이로 집단화된 촌락들이 여유롭게 전개되는 차창을 따라 1시간 10여분“복강”톨게이트를 들어서니 3일전 일본여행의 첫 기착지였든 바다와 선박 들이 늘어선 후쿠오카 의 하카타 항에 정박해있는 카멜리아호 가이드의 안내하는 시선 에 들어온다. &lt;BR&gt;9시35분경 항구에 서 그리 멀지 않는 마지막 관광지(觀光地) “오호리 공원” 은후쿠오카성(城)의 해자(垓子 : 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이용하여 만든 공원이다. 호수에는 작은 섬이 떠 있고,&amp;nbsp;이 섬과 호숫가를&amp;nbsp;잇는 3개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amp;nbsp;이것은 1927년 중국의 시후[西湖]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호숫가에 일본 국보인 간노와노나노코쿠오[漢委奴國王]를 전시하고 있는 후쿠오카시미술관과 일본식 정원이 있고, 동쪽 옆 후쿠오카성터에는 헤이와다이구장, 쇼와도리 건너편에는 벚꽃으로 유명한 시민공원이 있다. &lt;BR&gt;공원이래야 큰 호수 가운데 섬처럼 공원이 있고 오리 유람선이 차거 운 바람 속에 손님을 기다리듯 움집 해 있고 많지 않는 오리와 갈매기가 노니는 호수를 걸어 나가 건너에 대기한 차량에 탑승 아쉬운 日程에 써 비스로 한곳을 더 보여드린다는후 쿠호카 타워는 후쿠오카 워터프론트지구 시사이드모모치의 중심부에 있으며, 1989년에 건립하였다. 높이 234m로 일본에서 해변에 세워진 타워 가운데&amp;nbsp;가장 높으며,&amp;nbsp;외관은 약 8,000장의 반투명 거울로 덮여 있다.&amp;nbsp;타워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역시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건물 내부를 살펴볼&amp;nbsp;수 있다. 전망대는 지상으로부터 116m 지점과 123m 지점에 있으며 워터프론트지구, 하카타만(灣)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전망대 유리벽 위에는 후쿠오카 시내 주요 건물들의 위치가 표시되어 안내하는 대 이곳은 신도심 매립지로 지진 때문에 고층건물이 많지 않는 현실 때문에 더욱 명물 인 듯싶다. &lt;BR&gt;고층건물을 배경삼아 단체 촬영도 하고 좀 체로 느끼지 못한 차거 운 바람에 일행들은 볼 것 없는 듯 차량(車輛)의로 이동하고 부두까지 그리 멀지 않는 차창밖에는 유명한 잘 호텔이며 지붕이 시커먼 돔구장이 유난스럽다. 일정에 따라 우리일행이 귀국을 위란 카멜 리 아 호에 수속을 밟고 탑승을 하고나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lt;BR&gt;우리일행이 배정받은 룸은 다소는 적지만은 그래도 우리일행만 함께할 수 있는 307호를 택했고 하 카 다 항을 뒤로 하고 떠나는 2만 2천 톤급 “카멜리아호”는 넓은 태평양을 향진했고 태풍 예보나 기상 특보 조차 알지 못한 항해길 은 지난 출국 시와는 달리 무척 흔들림이 심했고 멀미에 약한 대다수의 여행객들이 구토와 멀미에 혼미 스런 시간이 연속 되었고 멀미를 해보지 않는 나에게도 대마도 옆을 지나는 시각에 행여 대마도를 볼까하여 선실 5층 갑판 대에 나가 있노라니 희뿌연 시야에 섬 자락만 보일뿐 속이 다소 매스꺼워 짐을 느껴 객실에 들어와 누어있는 것이 안정 스러 워 한 시간 여 남짓 당초 18:00에 釜山항 국제여객(國際旅客) 터미널에 도착하려든 여객선은 20여분 늦은 18:20분경 到着하여 40여분이 다되어서야 관광객(觀光客)들의 입국수속에 세관 검사 등을 끝내고 터미널 待合室(대합실)로 나오니 光州로 함께 行動(행동)해야 하는 羅州 文平(문 평) 의 관광객(觀光客)과 협의가 되지 않아 우리 37회의 부산(釜山)자갈치 시장에서의 저녁식사가 무산되어 서울과 전라도(全羅道)로 헤어 저야 하는 시간타임에 맞추어 형 년 총무 의 주문에 온 횟감을 서울과 전라도로 나누어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조이트래불 의 소리투어 (鳳凰욱 곡 故 최 길 언 씨 의막내 아들/T:018-621-8770)최 금호 기사의 관광버스에 탑승하였고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두어 시간 섬진강 휴 계소에서야 준비한 횟감을 안주삼아 간단한 휴 계소 회장국의로 저녁을 때우고 23시가 조금 넘어서 광주역(光州驛) 에서 3박 4일의 아쉬운 인사로 모든 일정을 마치며 망각의 시간을 다시한번 되 집어 보는데 조금이라 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행기(旅行記)를 나열 하여 아오나 부족한 문장력을 너그럽게 받아주시고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 항상 즐거움과 건강이 그리고 이번여행을 함께해주신 회원 여러분의 家庭(가정) 에 幸運(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lt;BR&gt;&lt;BR&gt;2007년 03월 日本 북큐슈 溫泉 旅行記: 鄭 燦 悅 씀 &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여행 이야기</category>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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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9 Jun 2013 15:57: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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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3년 6월 9일 오후 03:4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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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br&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21305A4C51B4250F37?original&quot; class=&quot;txc-image tx-blog-simple-img&quot; style=&quot;clear:none;float:none;&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320&quot; /&gt;&lt;/p&gt;&lt;p&gt;     ●. 만년산 등산길    2012.12.23 봉암(鳳岩) 기(記)
&lt;br&gt;           간밤에 내린 눈은 시간에 지쳐 녹아 나고 
&lt;br&gt;                               매섭게 이는 바람  잠든 숲을 깨우네
&lt;br&gt;           깊은 잠에든 몇잎 달린 낙엽도  
&lt;br&gt;                             칼바람에 깨어 나 춤을 추고
&lt;br&gt;          누렇게 갈아입은 잔디에는 
&lt;br&gt;                            축축한 물길이 젖고 젖어 
&lt;br&gt;
&lt;br&gt;          꽁꽁 싸매고 걷는 등산객  찬바람의 심술에도
&lt;br&gt;                            무리지은 등산 행 길 눈(雪) 내림 환영하고
&lt;br&gt;          심술궂은 구름만 자꾸만 내려져 
&lt;br&gt;                            벌어진 옷깃을 턱밑까지 여미 네. 
&lt;br&gt;          먼 산에 덮인 운무 간지럽게 걷혀 갈 때 
&lt;br&gt;                           어느덧 만연 산에 염불소리  들려오네. 
&lt;br&gt;
&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나의 이야기</category>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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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9 Jun 2013 15:47:5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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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바뀌여야할 墓와碑의 유산</title>
      <link>https://nk-ele.tistory.com/23</link>
      <description>&lt;P&gt;※.바뀌어야 할 선묘(先墓)와 묘비(墓碑)의 유산) &lt;BR&gt;추석날에나 구정명절에 산등성이마다 성묘(省墓)인파로 붐비는 것이 우리의 미풍양속 이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명절이 아니면 성묘할 기회가 없어서인지 요즘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명절이면 으레 성묘 행사가 따르게 되어 있다. 조상의 묘 앞에 엎드려 절하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같이 느끼는 기분 일줄 안다. 인생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엄숙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성묘 길에 이산 저산 훌터 보며 혹 좌청룡 우백호 의 명당자리나 없을까하고 살피는 것도 나이가 들면서 관심사라면 남이 웃을지도 모른다. 또한 등산길에서 또는 산행 길에서 비석이 있으면 걸음을 멈추고 묘비(墓碑)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수백 년의 역사가 거리를 단축하며 내 몸에 와 닿는 듯 하는 즐거움을 맛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묘비(墓碑)를 보다 보면 본관(本貫)과 성만 새겨놓은 묘석(墓石)이 있다. 나의 몇 대 방조(傍祖)인지 언제쯤 살다 가신 분인지, 당대에서만 알고 있는 분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죄송한 일이지만 도무지 비정(比定) 할 수가 없다. 아는 조상님 또는 산지기마저도 죽는 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그만이다. 별세(別世)하신 해(年)도 간지(干支)로만 돼 있어 “경인(庚寅)”이니 기축(己丑)이니 60년 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터에 120년 전인지 360년 전인지 세월의 풍우(風雨)에 손상된 그 묘석 가지고는 알도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 라도 선친(先親)의 묘에는 간지(干支) 다음에 연호(年號),월, 일 로 생(生), 졸(卒) 모두 병기해 놓고 , 무슨 공, 몇 대손 이라는 것과 성명 삼자를 또렷이 알 수 있도록 모셨으면 한다. &lt;BR&gt;&lt;BR&gt;그런데 근래 들어 발견한 것이 있다. 기왕 지사 선조(先祖)께서 지켜온 유교(儒敎)유산을 갑론을박(甲論乙薄) 한다기보다는 아쉽게 느껴지는 것으로 나는 세삼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가끔씩 아래채 사랑방에 손님을 모셨을 때면 빠짐없이 손님 앞에 공손한 인사를 하도록 강조하신 10여 년 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신 나의 부친에 대해서 말이다. 손님들이 다녀가신 몆 일이 지난 후면 으레 히 조상의 묘소를 이장하시고 때로는 남이모르는 밤중을 이용해 손님으로 다녀가신 풍수지리를 하신다는 어르신의 뜻을 따라 남의 선산에도 좋다는 명당이 있으면 주인 몰래 이장을 하셨다는 뒤늦게 들은 이야기를 말이다. 그렇다, 명당이라고 남의 산에다 함부로 주인 몰래 선조의 시신을 이장한 것을 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조상이 선조를 모시고자하는 그 옛날 풍습은 때로는 산(山)주인이 알면서도 눈감아주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고 남다르게 조상님 섬김이 깊으신 부친이시지만 세월은 남몰래 써둔 묘지를 그대로 두지를 않았었고 2~30년 전만해도 객지에 나가 죽으면 으래 이 고향뒷산이나 주인 없는 산야에 장례를 해왔었고 눈감아 주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진 현실은 설령 고향땅에 자기 선산이 있어도 함부로 묘를 쓸 수 없고 또한 쓰려고 해도 더구나 사나워진 민심 탓인지 한동네 한마을에서도 민가(마을)에서 400m 이내에는 묘지를 쓸 수 없다는 묘지 법(墓地法)을 내세워 아차하면 당국에 고발하고 투기하여 이제는 장소 좋은 묏자리도 소용없고 자기 선산에다 묘지마저도 쓰기 힘든 시대가 되었으니 현실이 너무 야박해지나싶어 가슴이 아프며 누구나 사람은 죽기마련이며 죽게 되면 결국 땅속에 뭍 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화장이며 납골당이니 수목장이니 새롭게 달라지는 묘지풍습이 있지만 아직도 조상선산에 묘를 쓰 고저 하는 효심에 재를 뿌리는 격이 걱정이 되어서 하는 것이며, 또한 지난세월 옛날 어른들로부터 대대로 물려온 유산을 이러 쿵 저러 쿵 참견하는 것을 개악(改惡)이라고 한다면 황공할 노릇이지만 그러나 시대의 흐름 에 따라 선친의 묘를 쓰는 장소도 많이 달라 저야 한다고 생각한다. &lt;BR&gt;자연의 훼손 이 적었던 옛날에야 음양오행(陰陽五行)사상에 좋은 명당자리를 잡아 유해를 평안히 모시려는 효도에서 그리고 조상에 효도 한만큼 후손의 발복(發福)을 위해서 좋은 명당자리를 잡아 험준한 산속에라도 선산으로 유해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유교사상의 도리이나 지금은 자연이 인간 에 의해 달라지고 개발되어 산기(山氣)가 한데 뭉쳐 명당 의로 주장하는 곳도 개발의 힘에 밀려 산맥이 뚫리고 잘려 도로가 새로 생기고 또 나가서는 혈(穴)또는 청룡 백호사이에서 시작되어 흐르는 물의 발원처(發源處)를 득(得)이라하고 .그 물줄기가 그 용호(龍虎)와 서로 껴안은 사이를 흐르는 곳을 파(破)또는 수구(水口)라 하여 좋은 명당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현실은 없었던 땜 과 수로가 새로 생기고 때에 따라서는 좌로 흐르는 물이 우로 흐르도록 물줄기를 바꾸어버린 현실 속에 설령 좋은 명당이 있다고 해도 음택(陰宅)의 맥(脈)이나 혈(穴)이 유지 되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명절이 아니면 성묘할 귀회가 없어서인지 요즘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떨어져 사는 후손들이 그것도 밀려 나는 교통전쟁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하례하며 깊은 산골의 선묘(先墓)를 찾는다는 것이 더 더욱이 장애가 되는 욱어진 풀숲 에 갇혀 분간하기 힘든 산속 산소를 찾는 것은 아무리 유교사상이 짙은 효손(孝孫)이라도 어려운 현실인 것이다. 명절이면 으레 성묘 행사가 따르게 되어 있다. &lt;BR&gt;&lt;BR&gt;참으로 조상을 위한 마음에서 고인 이 된 선조의 영생댁(永生宅) 이 되는 묘소를 풍광(風光)좋고 풍치 좋으며 조용하고 양지 바른 곳을 선택해야 한다는 효심으로 후손이 빨리 찾아보기 쉬운 교통이 최소한 승용차라도 다닐 수 있는 그런 곳이 가장 좋은 명당(明堂)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역리학(易理學)이나 지상(地相)을 무시한 막연한 이치요 순수한 효심의 발로지만, 그러나 어떤 학술적인 이론도 그 근본의 목적은 똑같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부모님을 풍치 좋은 산에 모신다는 생각으로 현대판 산소를 찾는다면 사람이 사는 집을 지을 때 장소를 생각하듯이 먼저 교통이 원만한 양지 바른 산이면 좋다. 다음에 바람막이가 있어야 하며 ,산이 수려하면 더욱 좋다. 게다가 묘 앞을 흐르는 호수나 저수지 혹은 연못, 아니 바다라도 보이면 풍치가 아름다워 산사람도 지루하지 않듯 그런대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 위에 멀리 보이는 앞산이 양쪽으로 봉우리 져 있다면 더욱 좋다는 것이다. 과연 욕심으로 생각하는 그런 곳이 과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쓸 만한 장소가 있다고 해도 교통이 원만한곳은 각박한 민심이 옛날처럼 함부로 묘를 쓰기가 쉽지 않고 선묘(先墓)매장이 까다로워진 현실이 야박스러울 뿐이다. &lt;BR&gt;&lt;BR&gt;또한 선묘 문제는 그렇다는 생각이고 선산에 있는 비문을 보면『학생 공(學生 公)』이것은 꼭 고처야 한다고 생각 해 서다. 예전에야 벼슬을 하거나 요즘 말하는 사무관급(5급 공무원)급 이상이 되어야 학생부군 을 모면한다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남의 산소건 우리산소건, 앞으로 우리 후손 을 생각해서 의미 있는 생각으로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옛날에 돌아가신 분은 어쩔 수 없으나, 해방 후에 다듬고 정비한 산소에 까지 마구『학생 공(學生 公)』이니 『유인(孺人)』이니 새기는 것은 그 의미를 알고 쓰는 것인지 모르고 쓰는 것인지 딱하다. 우선 돌아가신 분에게 큰 실례가 된다. 고려나 조선 왕조 시대엔 정일품(正一品)“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서부터 종구품(從九品)“참봉(參奉)”까지 18품계(品階) 제도가 있어 나라에서 받은 품계대로 ,격식에 맞추어 위폐(僞幣)나 묘비(墓碑)를 썼었고, 따라서 그 배우자도 일품(一品) 정경부인, 이품 정부인, 삼품 당상관 땐 숙부인, 삼품 당하관 땐 숙인, 사품 영인, 오품 공인, 육품 의인, 칠품 안인, 팔품단인, 구품 유인. 식으로 사용 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학생(學生)“ 이란 아무 품계도 없는 백성, 고처서 말하면 상민이 백두(白頭:벼슬이 없는 사람)로 죽고 보니 하도 원통해서 생원, 즉 학생이기에, 벼슬을 못 한 채 공부하다가 그만 저승 에 갔 다 라는 뜻으로 쓰는『학생 공(學生 公)』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에도 엄밀히 말하면 향시(鄕試)를 거처야 학생(學生)이지 누구나 함부로 ”학생(學生)“일수는 없지만 ,죽은 사람의 위령을 위해서 추서(追敍)하는 셈치고 나라에서도 눈 감아 준데서『학생 공(學生 公)』이라고 했다. 배우자의 경우도『유인(孺人)』은 구품까지 첩지를 받아야 유인(孺人)이건만 저승에 갔으니 ,품 일등 올려도 눈감아 준 것이『유인(孺人)』의 유래다. 이렇게 그 내력을 알고 보면 상당한 학식과 사회적 공헌을 한 자기 부모를『학생 공(學生公)』이니『유인(孺人)』이니 하여 격상시켜 묘석과 지방(紙榜),축문에 그대로 모신 다는 게 그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효 학생부군(孝 學生府君) 』이라고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은 신세대 한글 후손들이 과연 얼마나 이해를 할 것인가 평소에 존경해 사용하는 ”아버님“”어머님“ 다음에 성명 삼자(參 字)를 떳떳이 사용하면 되는 것이며 거기다. 정부에서 받은 직위 로 .이사관, 서기관, 기업의 회장(會長), 기업의 사장(社長), 등 직함을 밝혀드리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까 싶다. &lt;BR&gt;&lt;BR&gt;사실 묘비(墓碑)나 족보(族譜) 같은데서 보면 과장도 만이 눈에 뜨인다. 현재를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별로 큰 실해(實害)가 없는 일이라 대부분 알고도 못 본체 덮어두는 경우가 많지만 ,근자엔 돈푼이나 벌었다고 마구잡이로 신도비에다가 왕릉이나 귀족의 원 같은 봉분과 입석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이것은 국민의 정신 위생상 곤란한 일이다. 더구나 국토의 1.1%가 묘지로 덮였다고 해서 규제 론이 대두된 오늘날에 와서는 조상 숭배와 현실을 조화 시키는 엄격한 규제가 있어야 마땅하리라고 생각된다. 하긴 이런 푸념을 할 수 있는 것도 언제까지냐가 문제다. 살아있는 사람도 주택난에 시달려 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저승도 이젠 만원 상태로 주택난처럼 묘지난이 심하리라 짐작 된다. 그래서 유계(幽 界)의 아파트 단지라 해야 옳을 공동묘지 같은 사업이 제법 활발해졌다. 얼마 안가서 거기까지 복부인들이 들이 닥칠 염려도 있겠지만 추석 성묘 길에『학생 공(學生 公)』이건『유인(孺人)』이건 독(獨)집 차지한 조상은 그래도 주택난은 면 했구나 싶어 다행이구나 생각하며 국토계발 계획과 더불어 묘지 문제와 그리고 근본적으로 장례와 수 묘제도(修墓 制度)의 큰 변혁이 검토 되어야할 시기가 된 것 같아 글을 올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저승길로 보내야하는 가슴 아픈 장례나 모처럼 날 받아 조상의 묘를 이장이라도 하시는 날에 뜻하지 않은 불편이라도 사전에 알아두면 좋은 점이만을 것 같아 필자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전문개정 2000. 01.12 법률 제6158호),시행규칙전문개정 2001. 03.24 보건복지부령 제190호, 시행령 전문개정 2001 .01.27 대통령령 제17109호 그리고 2010년 12월 항공사진을 기준으로 묘지풍습에 따라 현재까지 불법 조성된 묘지는 잠정 적으로 인정하고 15년후 연장 신청하는 방안을 기사에서 보았기에 아래에 열거하겠습니다. &lt;BR&gt;하동정씨 경렬 공파 19세 孫 찬 열( 燦 悅) 씀 . 2011년10 월 &lt;BR&gt;&lt;BR&gt;●.묘지법 개정내용(법 제 15조 관련) &lt;BR&gt;★묘지 법령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lt;BR&gt;◑. 이런 지역에는 묘지(납골묘)를 설치 할수 없습니다. &lt;BR&gt;-도시계획법에 의한 주거, 상업, 공업지역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문화재 보호구역 &lt;BR&gt;-수도법에 의한 상수원보호구역(묘지만) /-하천법에 의해 지정. 고시된 하천지역 &lt;BR&gt;-농지법 의해 지정된 농업진흥지역 /-산림법에 의한 채종림. 보안림. 요존 국유림 &lt;BR&gt;-사방사업법 의해지정. 고시된 사방지 /-군사시설보호구역 및 군사보호구역 &lt;BR&gt;-다른 법령에 의해 설치할 수 없는 지역 &lt;BR&gt;-도로법 제50조 및 고속 국 도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해 지정. 고시 및 지정된 접도구역 &lt;BR&gt;-묘지는 도로, 철도로 부터 300m이상,20호이상의 인가 밀집 지역으로부터 500m이상 떨어져야 함. &lt;BR&gt;(사설묘지 설치기준 법제 15조 관련) &lt;BR&gt;&lt;BR&gt;◑묘지를 설치할 때는 산림법, 농지법에 의해 묘지로 허가를 받은 후 설치하여야 합니다. &lt;BR&gt;※개인묘지는 설치 후30일 이내 읍면동사무소에 신고를 하셔야 됩니다. &lt;BR&gt;☞묘지의 점유면적 &lt;BR&gt;-개인묘지 : 30m2㎡이내 /-가족묘지 : 100m2㎡이내 /-종. 문중묘지 : 1,000m2이내 &lt;BR&gt;※분묘기당 면적 &lt;BR&gt;→1기당 10m2㎡이내, 합장은 15m2이내 /-시설물 : 비석1개,상석 1개 (높이2m,표면적 3㎡이내) &lt;BR&gt;-봉분 높이는 지면으로부터 1m이내 평분의 높이는50cm이내 &lt;BR&gt;♣묘지설치기간은 15년, 경과 후 15년씩3회 연장가능(최장60년) 묘지 법률을 준수합시다. &lt;BR&gt;☞2년 이하 징역, 1천만원이하의벌금 &lt;BR&gt;-가족묘지 ,종중, 문종묘지를 허가 받지 않고 설치한자---이전명령 &lt;BR&gt;-묘지(납골묘)를 설치 할 수 없는 지역에 설치한자---이전명령 &lt;BR&gt;☞1년 이하징역, 500만 원이하 의 벌금 &lt;BR&gt;-묘지외의 구역에 매장한 자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개장한 자 &lt;BR&gt;-묘지(납골묘)의 면적기준 또는 시설물 설치기준에 위반한 자 &lt;BR&gt;☞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lt;BR&gt;-개인묘지 설치 후 30일내 신고하지 않은자 /-신고 없이 납골묘를 설치한자 &lt;BR&gt;☞100만 원이하의 과태료 &lt;BR&gt;- 매장, 화장, 개장신고를 하지 아니 한자. &lt;BR&gt;☞이행 강제 금1년2회500만원씩 부과 &lt;BR&gt;-묘지설치 제한지역, 묘지점유면적위반으로 이전명령 등을 이행하지 않은 자 &lt;BR&gt;-묘지이전, 개수명령을 받고 이행하지 않은 자 &lt;BR&gt;&lt;BR&gt;◑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납골묘 설치를 권장합니다. &lt;BR&gt;☞납골묘지 면적 &lt;BR&gt;-개인납골묘 : 10m2㎡이내 /-가족납골묘 : 30m2㎡이내 (가족별1개소) &lt;BR&gt;-종중. 문중납골묘 : 100m2㎡이내 (종중. 문종별1개소) &lt;BR&gt;※사당, 재실은 납골 면적 내에 설치하여야 합니다. &lt;BR&gt;☞납골묘 신고 관계서류 &lt;BR&gt;-개인, 가족납골묘 &lt;BR&gt;. 지적도 또는 임야도, 납골묘 평면도, 위치도, 측량 실측도, 토지등기부등본 &lt;BR&gt;-종중. 문중납골묘 &lt;BR&gt;납골묘 설치 종중. 문중회의록 지적도 또는 임야도,납골묘평면도,위치도,측량실측도, 토지등기부등본 &lt;BR&gt;※타인 토지 시는 사용 승낙 서 첨부 &lt;BR&gt;&lt;BR&gt;◑사설묘지 신고, 허가서류 &lt;BR&gt;-개인묘지 신고, 가족묘지허가 &lt;BR&gt;-지적도 또는 임야도, 묘지평면도, 묘지소재지 위치도(약도), 측량실측도, 토지등기부등본 &lt;BR&gt;☞종중, 문중묘지허가 &lt;BR&gt;- 묘지설치에 관한종중. 문중회의록. 지적도 또는 임야도, 묘지평면도, 묘지소재지 위치도 (약도), 측량실측도, 토지등기부등본 &lt;BR&gt;&lt;BR&gt;◑묘지업무 처리는 이곳에서 &lt;BR&gt;☞읍면동사무소 :-매장, 화장, 개장신고 &lt;BR&gt;☞시청사회복지과(☎530-6211) &lt;BR&gt;-가족묘지, 종중, 문중묘지허가 /-납골묘(개인, 가족 등)신고 &lt;BR&gt;-무연분묘 개장허가 /-기타 묘지업무 전반. &lt;BR&gt;&lt;BR&gt;◘.묘지설치 기준(법 제15조 관련)을 좀더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lt;BR&gt;가) 개인(個人) 묘지(墓地) &lt;BR&gt;⓵. 지형, 배수, 토양 등을 고려하여 붕괴 침수 의 우려가 없는 곳에 설치하여야한다. &lt;BR&gt;⓶. 분묘의 형태는 봉분 또는 평분으로 하되 봉분은 높이가 지면으로부터 1m이하의 높이 로하며 평분의 높이는 50cm를 넘지 않아야 한다. &lt;BR&gt;⓷.석축과 인입도로의 계단을 설치 할 때는 붕괴의 우려가 없도록 하고 법제 18조 2항에 따라 신고 면적 내에 설치해야 한다. &lt;BR&gt;⓸. 토지나 지형의 상황에 따라 다음 시설의 기능이나 이용 등의 지장이 없는 경우로 시장 등이 인정하는 다음의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 할 수 있다. &lt;BR&gt;ⓐ, 도로법: 제 2조의 도로. 철도산업 기본법: 제3조제2호의⓶철도의 선로, 하천법: 제2조 2호의 하천구역 또는 그 예정 지역으로부터 300m이상 떨어 진 곳 &lt;BR&gt;ⓑ, 20호 이상의 인가 밀집지역, 학교, 그 밖의 공중이 수시로 집결하는 시설 또는 그 장소로부터 500m 이상 떨어 진곳, &lt;BR&gt;나) 가족(家族) 묘지(墓地) &lt;BR&gt;⓵.가족묘지는 가족 당 1개소로 제한하되 그 면적은 100m2이하 여야 한다. &lt;BR&gt;⓶.봉분 또는 평분으로 하되 봉분의 높이는 지면으로부터 1m 이하 이며 평분의 높이는 50cm이하 여야 한다. &lt;BR&gt;⓷.지형, 배수, 토양 등을 고려하여 붕괴 침수 의 우려가 없는 곳에 설치하여야한다. &lt;BR&gt;⓸.석축과 인입도로의 계단을 설치 할 때는 붕괴의 우려가 없도록 하며 가족묘지 허가 내에서 설치하여야 한다. &lt;BR&gt;⓹. 분묘가 설치되지 아니한 지역은 잔디 화초 ,수목 등으로 녹화(綠化)하여야 한다. &lt;BR&gt;⓺.. 토지나 지형의 상황에 따라 다음 시설의 기능이나 이용 등의 지장이 없는 경우로 시장 등이 인정하는 경우에는 개인 묘지 법 제 4항 ⓐ,ⓑ,항과 같은 적용을 받아 그러하지 아니 할 수 있다. ⓻ &lt;BR&gt;다). 종중(宗中), 문중묘지(門中墓地) &lt;BR&gt;⓵.종중 또는 문중 별로 각각1개소에 한정하여 설치 할 수 있으며 그 면적은1,000m2이하 묘지 로 한다. &lt;BR&gt;⓶.봉분 또는 평분으로 하되 봉분의 높이는 지면으로부터 1m 이하 이며 평분의 높이는 50cm이하 여야 한다. &lt;BR&gt;⓷.지형, 배수, 토양 등을 고려하여 붕괴 침수 의 우려가 없는 곳에 설치하여야한다. &lt;BR&gt;⓸.석축과 인입도로의 계단을 설치 할 때는 붕괴의 우려가 없도록 하며 중중, 문중 묘지 허가 내에서 설치하여야 한다. &lt;BR&gt;⓹. 분묘가 설치되지 아니한 지역은 잔디 화초 ,수목 등으로 녹화(綠化)하여야 한다. &lt;BR&gt;⓺. 토지나 지형의 상황에 따라 다음 시설의 기능이나 이용 등의 지장이 없는 경우로 시장 등이 인정하는 경우에는 개인 묘지 법 제 4항 ⓐ,ⓑ,항과 같은 적용을 받아 그러하지 아니 할 수 있다. &lt;BR&gt;라).사설묘지(私設墓地) 설치 제한(制限)지역[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 17조 동 시행령 제22조] &lt;BR&gt;♣. 국토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제 36조 제1항 녹지 지역중 대통령으로 정하는 지역(주거, 상업지역 및 공업지역, 개발 제한 구역) &lt;BR&gt;♣.수도법 제 1항에 따른 상수도 보호 구역. &lt;BR&gt;♣.문화재보호법 제9조 및 제 71조에 따른 문화재 보호 구역. &lt;BR&gt;♣.환경정책 기본법에 따른 특별 대책 지역. &lt;BR&gt;♣.도로법 제49조 및 고속 국도 법 제 8조의 규정에 의하여 지정 고시된 구역. &lt;BR&gt;♣. 하천법 제 10조에 따라 지정 고시된 구역. &lt;BR&gt;♣.농지법 제 28조에 따라 지정된 농업 진흥지역(농업보호구역 포함) &lt;BR&gt;♣.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및 제 19조, 제 43조, 제 47조, 제48조에 따라 지정 고시된 채종림, 보안림, 산림유전자 보호림, 등 특별 산림 구역. &lt;BR&gt;♣.국유림의 경영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 16조 1항에 따른 요존 국유림. &lt;BR&gt;♣.백두대간 보호법에 따른 법률 제 6조에 따라 지정 고시된 백두대간보호지역. &lt;BR&gt;♣.사방사업법 제4조에 따라 지정 고시된 사방 지. &lt;BR&gt;♣.군사시설 보호법 제4조에 따라 시설된 군사시설 보호 구역 및 군사기밀 보호법제 5조에 따라 설정된 구역. &lt;BR&gt;♣.붕괴 및 침수 등으로 인하여 보건 위생상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지역. &lt;BR&gt;관혼상제(冠婚喪祭) 는 여러 학자들의 예설(禮說)에 관하여 그 요령을 뽑아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알맞게 &lt;BR&gt;편찬 한 헌종(憲宗)11년(1844년)에 간행 된 유교식(儒敎式)으로 일변된≪사례편람≫으로1969년3월5일 대통령 고시 제15호로 공포된 전문4장 71개 조항으로 권장되어 왔다가 그 후 개정한 전문 24개 조항의 『가 정의례준칙』1973년5월17일로 대통령령 제 6680호 제정 공포되어 법률로서 시행 하게 된〈신구 관혼상제 김관봉(金寬峯)님의 편저와 최근에 새로 제정된 준칙을 적용한 민속학자 최상수(崔常壽)교수님이 감수資料왕조실록 ※ . 참고 문헌 (朝鮮王朝實錄) / 목대 김 관수교수님“야월독백” / 민족문화(民族文化) 대백과 사전 &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나의 이야기</category>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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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9 Jun 2013 15:41:0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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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국 곤명(운남성)석림, 구향동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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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amp;nbsp;&lt;/P&gt;&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U style=&quot;text-underline: #000000 single&quot;&gt;&lt;/U&gt;&lt;U style=&quot;text-underline: #000000 single&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5pt&quot;&gt;鳳凰37會 中國 云南省 (昆明/石林/九香洞窟) 3박5일 旅行&lt;/SPAN&gt;&lt;/U&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5pt&quot; &gt;☛,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日時:2013년03월07일~03월11일, 주간여행사: (주)온라인투어(02-3705-8131)&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 &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곤명현지여행사 가이드 김 성 엽(연변 출신 80년생)경력10년 곤명(昆明) 현지 가이드3년&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여행비용:1인당804,000원&lt;SPAN style=&quot;FONT-SIZE: 8pt&quot; &gt;(항공권 전 일정,(2인1실)식사, 전용차량, 가이드, 입장료, 여행자보험, 기사, 가이드 팁,1회 발 맛사지.&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숙박 호텔: 云南 금화 국제 주점/云南省 昆明市 北京路96号 / TEL:0871-3543355/http//:ynjihua-hotel.com&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旅行者名單:&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 &gt;seo young youl+hong seok hwang=2103 / kim jae ok +lee ok ja=2104&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 &gt;&lt;/SPAN&gt;
&lt;P class=바탕글&gt;&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4pt; mso-fareas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quot; &gt;03월07일 목요일 날씨 흐림(여행 첫날)&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개인택시를 12시50분에 콜 하여 광주 종합버스 터미널에 도착 한 것은 13시15분 경이였다. 13시 50분에 이곳 광주에서 출발하는 인천 공항 행 우등고속 버스표 9명분을 예약해야하는 것은 19시 까지 도착해달라는 일정도 맞추기 위함이며 우등고속의 막차이며 다음 차는 심야우등으로 요금의 편차도 문제 가되어 1개월 전에 9명분을 예약 했는데 3월5일부로 1300원이 인상된 편도 32,300원이 되 버려 일찍 구입한 보람 속에 출발시간 10분전에 9명 전원이 차질 없이 설래 이는 마음으로 공항버스에 탑승 했고 13시50분 정각에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대천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달리는 버스가 공항 근처를 다다를 무렵 창밖에는 온통 안개가 시야를 가릴 뿐 공황활주로 유도등 불빛이 인천 공항에 다 왔음을 알 때는 버스는 3층 게이트 앞에서 탑승한 손님을 하차하여 여행 가방까지를 챙겨 공항 3층 청사로 들어가 전 회원 33명이 도착 한 시간은 20시30분 경이였고 온라인투어 의 직원의 인원 점검 후 3층 수화물 탁송 카운터에서 여행 가방들을 탁송시키고 가벼운 마음들이 술렁임 으로 변 할 때는 중국에서 오는 동방항공MU2004 기가 인천공항의 안개 때문에 착륙을 하지 못하고 끝내는 김포공항으로 착륙한 탓에 내일 아침에야 시간도 확정되지 않은 체 지연된다는 것이다. 몇몇 회원들은 취소해버리고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단체여행 은 비자 발급이나 모든 것이 전체가 취소는 있을 수 있지만 한두 명의 취소는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불란 과 소란은 늦은 시간과 이곳 인천공항 주변 여건상 공항순환버스 다섯 정거장에 에 위치한 몇 채의 건물이 있는 신도시 대형 찜질방에 신세를 지게 되는 회원들의 집 나서면 고생이라는 여행 첫날의 시간들은 불편함 속에 묻혀갔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4pt; mso-fareas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quot; &gt;03월08일 금요일 날씨 구름(여행 둘째 날)&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다수의 여행객이 똑같은 불편 속에 아침여명을 가르는6시경 정식식당도 아닌 찜질방에서 시켜먹는 조반은 서로가 감내해야할 불편 속에 6시40분 출발하는 순환버스에 우리 일행은 탑승하여 인천공항 출국장에 도착 한 것은 7시경 이였다. 곤명행비행기 출발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09시20분 출발 소식에 다소는 간밤의 피로도 잊은 채 출국을 기다리는데 주간여행사 직원은 누구하나 얼굴이 보이지 않아 가장 애타는 총무 영렬친구의 당황 속에 기다리다 못한 회원들이 출국 수속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불평과 불만 속에 쫒기 듯 어렵게 300여명 을 거의탑승한 우리를 태운 동방항공 비행기는MU2004기종으로 이곳 인천공항에서 3,200KM에 약 4시간이 소요된다는 안내 와함께 이륙 전 기내의 유의사항과 안전사항을 영어와 한국어로 방송하며 인천공항의 짙은 안개로 출발이 지연됨을 양에 해주시라는 안내하며 9시 40분에 인천공항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상공으로 우리들의 불편한 심기를 하늘로 실코 날아오르기를 10여분 후 구름층을 벗어나 따스한 햇 빚 속을 곤명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한 시간 가량을 지난시각 기내식은 누구하나 불평 없이 끝내고 두어 시간의 단잠 들을 깨우는 것은 기내방송에서 잠시 후 곧 곤명(쿠밍 공항)에 도착한다는 방송에 닫혔던 기내 창문 커 텐을 열어젖히니 산허리곳곳에 올망졸망 논밭과 담수호가 보이는 듯싶더니 죽죽 뻗은 고속도로며 정비된 들판 과 하얗게 드러낸 하우스 등은 네 시간이 다되는 13시30분경 곤명공항 활주로에 무사히 도착 한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한국에서부터 가이드가 동반 하지 않은 불편 을 감수하며 곤명(kunming)공항을 나와 “봉황 37회동창회” 라 는 피켓을 든 젊은 청년을 따라 42인승 버스에 탑승한 차량은 33명의 정원을 확인 한 후 차내 마이크를 잡은 현지가이드는 유창한 한국어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며 하는 음성은 여성 도 아닌 중성의 목소리에 중국의 비행기는 항상 믿을 수가 없다는 유모 어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불편한 심기를 위로 한다 음 이곳 곤명(昆明)은 중국(中國)서남쪽 변방에 위치하며 베트남 ,미안마, 라오스 삼국과 국경(國境)을 접하고 있는 운남성(雲南省)은 남한 면적의 4배에 해당하는 면적에 인구 약 4,500만 명에 26개 의 소수민족이 중 동남아 문화가 85% 인도 남방 문화가 15%를 점유하는 생활을 하고 있단다.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오색찬란한 화려한 성으로 각인 될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성도(省道)는 곤명시(昆明市)로 약 2,4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원전 초(楚)나라의 한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지배 한 뒤 한나라를 거쳐 1274년 원대에 곤명현(崑明縣) 이 설치 되었다. 곤명(昆明)이라는 이름은 이 일대에 살고 있던 부족(附族)의 이름이며 1919년 중국 지역을 공식 적으로 분할 정리 하면서 운남시(雲南市)가 생기고 1922년 정식으로 곤명시(昆明市)라 칭해졌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곤명(昆明)은 태평양 전쟁에는 토호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일본(日本)의 동남아(東南亞)침략의 교두보로도 이용 되었다. 면적이 21,111km2 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날씨가 온화하여 연평균 일조 시간이 2,400 여 시간 으로 ‘춘성(春城),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는데 해발 1,894m의 운귀고원(雲貴高原)에 위치해 있어 사계절이 모두 봄처럼 따뜻하여 한겨울 철에도 최저 기온이 영하1도이며 지금의 아침온도는 영상 4도 정도로 온화한 탓에 겨울이면 이곳 중국이나 한국 축구 선수들의 동계 훈련의 적지로 유명하단다. 또한 7월중 최고 온도는 29도 이며 언제나 꽃이 만발하고 산이 푸르고, 대게는 5월부터 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비가 오며 이기간의 강수량은 평균 1,500mm정도이며 동백꽃이 만발한 2월이 곤명(昆明)을 여행하기에는 가장좋은 시기라며 지금은 가뭄이 지속되어 담수호의 물도 줄어 가뭄을 받고 있으나 이런 자연환경(自然環境)에 어울려 수많은 명승고적(名勝古蹟)이 자리하고 있는 중국(中國)최고의 여행지로 주택이나 아파트 호텔 또한 난방시설이 되지 않아 곤명(昆明)을 찾는 손님들에게 가장 애로를 느끼는 부분이 있어 여러분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비를 들어 숙소인 호텔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아 드린다며 우리들의 박수를 유도하는 재치를 발휘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작년부터 달라진 중국 여행의 여권(旅券)관리는 개개인이하며 단체 비자는 한사람이 잘 보관 해달라며 본인은 (주)온라인 투어 곤명현지여행사 가이드 김 성 엽(연변 출신 80년생)가이드 경력10년으로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반갑다는 인사를 하며 중요한 소지품은 작은 가방에 담아 목에 걸어 가방이 앞으로 향 하게하여 도난이나 분실을 예방 하도록 강조 하는 것은 이곳의 치안질서가 어지러움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달리는 차창 밖의 대체로 잘 정비된 도로며 2~3계층의 고가 인터 췐지 며 도시철도며 지하로 정비된 듯 전기, 통신선로가 보이지 않고 가로 등주만이 정렬되어 깨끗한 거리의 변신 이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중기며 건설 장비들이 중국에서도 가장 발달하고 내수판매가 높은 곳이란다. 현지시간 14시 50분경 곤명(昆明)에서의 점심 식사는 현지 식(現地食)으로 유명한 쌀국수인 미시엔(米線) 메뉴란 인데 이것은 쌀을 발효시켜 희고 부드러우며 시원한 감촉을 주는 면발과 닭기름 국물, 음식 재료가 따로 나와서 각각 그것들을 기호에 맞게 첨가해 먹는 음식으로 쿼치아오미엔(過橋米線) 이라고도 하며 운남 음식(雲南飮食)을 대표 할 정도로 유명하며 현지 돈으로 5원~100원의 천차만별이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우리의 점심시간은 30여분 15시 25분에 관광버스에 올라타고 비행기의 하루 늦은 도착으로 가이드 나름대로 짜여 진 것을 양해해 달라는 주문으로 우리 일행 역시도 그 가이드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 서산 용문(西山龍門)&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첫 번째 코스는 서산(西山)에서 가장 장관이라 할수 있는 용문(龍門)으로 시간이 많으면 걸어서도 갈수 있으나 우리일행에게 선택된 건 10여분 전동카를 타고 도착하여 두 명이 함께 타는 리프트 카 탑승 장 이였고 리프트카를 타고20여분 오르는 산악의 전경은 절벽에 영웅이 마치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공중으로 비상하는 듯한 기세를 느낄 수 있는 달천 각(達天閣:하늘에 닿는 누각) 인용문(龍門) 풍경 지구이다. 한참을 오르는데 굴은 빗방울이 이마를 적시는데 그 빗방울의 깨끗함은 이곳이 오염되지 않은 환경을 여실히 보여주고 얼마 후 비는 멎어 리프트 카 종점에 도착하여 지금 부터서는 걸어서 30여분 연출된 장관을 관람하는 시간으로 롱 먼은 청대인 1840년부터 1853년 까지 13년에 걸쳐 만들어 졌으며 70여명들의 석공들이 밧줄에 매달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돌을 파내어 그 피와 땀으로 석실(石室), 신상(神像), 돌다리 등이 만들어 졌단다. 용문(龍門)에서 정상(頂上)을 쳐다보면, 오 백리 정도 떨어진 전지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 할수 있다. 삼천각(三天閣)을 지나다 보면 별유동천(別有洞天)이라 적혀진 석문(石門)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나한상 절벽 상에 위치한 용문(龍門)풍경구이다. 돌로 된 터널을 지나다보면 첫 번째 석실(石室)이 나오는데, 절벽위로 세 겨진 그림이나 글 따위들이 알아보기는 쉽지 않 치만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앞으로 조금 더 내려 가다보면 보타(普陀)관광지구가 나오는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절벽사이로 터널이 있으며, 마치 굽이져 돌아가듯 만들어져있고, 높이는 비교적 높은 편이며 절벽위로 창문 같은 것이 있고, 아래로는 연못이 있는데, 이것 또한 매우 아름답고 놀라와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만하다. 또다시 30여m가다보면 두 번째 석실(石室)인 자운동(慈雲洞)이 나오는데, 그 뒤로 방과 같은 홀이 있고 이곳 벽 위로 송자관음(送子觀音)이 조각 되어 있어 앞부분의 홀에는 마치 절벽을 그 위로 걸쳐 놓은 듯, 하며 앞으로 굽이친 부분에 전지가 자리 잡고 있다. 또다시 5분여 진행 하다 보면, 높이 세워져 있는 듯한 용문(龍門)이보이며, 골목을 지나면 달천각(達天閣)이 나온다. 이곳에는 문방(門坊), 평대(平臺), 석도(石道), 석실(石室), 신상(神像), 향로(香爐), 촉안(燭案), 공품(供品),등이 있고 모두 암석(巖石)위로 조각이 되어 있다. 한참을 용문에 정신이 팔리다 가이드가 지목하는 바다처럼 드넓은 눈앞의 전경은 한 폭 의 그림 같은 곤명호수는 중국 최대의 담수호로 진주양식의 최대기지로 탈바꿈 하고 있단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대략 한 시간 30여분이 걸려 내려오니 우리를 기다리는 소형 전동 카에 10여분 달려 우리가 타고 온 버스에 몸을 실고 이동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 꽃 박람회로 유명한 화훼시장 그리고 한원 다도 관(翰苑茶道款)&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이곳은 홍콩, 마카오 ,싱가 포루, 태국, 일본, 등으로 수출되고 동남아 지역의 주요한 수출 생산지의 기본을 보여주는 화훼시장으로 안내되어 그리 크지 않은 꽃들은 생화보다 인조 꽃다발이 생화처럼 선보이는 관람을 마치고 저녘 현지 식 으로 안내 되는 버스 안에서는 이곳의 음식들은 기름기가 많으므로 너무 많이 먹지도 말고 약간 부족 한 듯 드시되 입맛에 다소나마 도움을 주기위에 이곳곤명에서는 귀한 직접 집에서 담근 김치와 버섯 무침을 식사 때마다 올려 드리겠다니 모두가 좋아하며 또다시 가이드에게 박수로 보답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우리 일행이 &lt;U style=&quot;text-underline: #000000 single&quot;&gt;운남(雲南)&lt;/U&gt;&lt;U style=&quot;text-underline: #000000 single&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한원 다도 관 을&lt;/SPAN&gt;&lt;/U&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mso-fareas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quot; &gt; &lt;/SPAN&gt;찾은 것은 가이드의 안내 계획에 의한 것이지만 이곳 곤명(昆明)이 산지(産地)인 오룡차(銕觀音), 야생차(苦丁茶), 화차(三七花茶),&lt;SPAN style=&quot;FONT-FAMILY: 궁서체; mso-hansi-font-family: 궁서체; mso-ascii-font-family: 궁서체&quot;&gt;완전 발효 흑차(普洱茶)&lt;/SPAN&gt;등이 유명한대 그중에서도 보이차&lt;SPAN style=&quot;FONT-FAMILY: 궁서체; mso-fareast-font-family: 궁서체; mso-hansi-font-family: 궁서체&quot; &gt;(普洱茶)&lt;/SPAN&gt;의 유명세 는 그냥 넘길 수가 없어 다수(多數)의 우리 일행이 미용과 다이어트, 위장 ,간 보호, 당뇨와 혈압(血壓)에도 좋아 인체의 열을 조절 할 수 있다는 전통(傳統)의 발효차(醱酵茶)를 특히 수면에 시달리는 집사람, 혈액순환 장애로 고통 받는 점을 중시하여나 역시도 구입 하였든 것이다. 진실(眞實)이 어데 까지 인지 궁금 속에.....? &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 . 남평 보행 가(南平 步行 街)&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현지시간19시에 저녁식사를 끝내고 쫒기는 듯 서둘러 시내로 이동한 다음 스케줄은 곤명(昆明)의 명동거리이자 최대의 번화가(繁華街) 의 &lt;U style=&quot;text-underline: #000000 single&quot;&gt;남평 보행 가(南平步行街)&lt;/U&gt;의 거리는 예전에 번화가는 초라하게 변해있고 새로 단장된 곤명(昆明)의 번화가라 해도 한적한 광주에 충장로 거리에 비유해야 알 맡는 표 헌 일까?&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 . 운남(雲南) 영상 가무(歌舞) 쇼&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20여분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걸은 뒤 다음 스케줄에 찾는 곳은 1인당 30불하는 곤명(昆明)에 오면 빠뜨 릴수 없는 영상 가무쇼 로 천지 창조를 시작으로 두 번째 기우제 세 번째 소수민족의 전통(傳統) 무용(舞踊)과 생활 형태를 춤과 소리로 표 헌 하며 공연에 사용하는 도구들은 그들의 실생활에서 쓰여 지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출연진의 70%이상이 전업 배우가 아닌 실제 소수민족 거주지에서 뽑혀온 사람들이 소수민족 전통문화와 현대 무용이 결합된 운남 영상(雲南映像)에서 가장 볼거리는 “월광 무(月光 舞 : 달빛 춤), 네 번째 성지순례 그리고 다섯 번째 그 유명한 장예모 감독이 기획한 공연(公演)으로 운남성(雲南省)의 공작 춤 이였다. 오늘 따라 이공연의 예술 감독인 50대 중반인데도 30대의 미모를 자랑하는 ”양리핑“이 직접 출연한 행운의 날이란다. 공연 중 촬영은 할수 있어도 카메라 후래 쉬를 터뜨리는 것을 금지하는 줄을 모르 는 체 사진을 찍다가 제재의 수난을 받기도한 2시간에 걸친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영상 가무 쑈 였 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22시에야 공연까지 끝마친 강행한 하루의 일정은 공연장에서 10여 분 관광버스를 타고 2박의 숙소로 정해진 23층의 운남성(云南城)곤명시(昆明市)북경로(北京路)96호(号)있는500여 객실이 있다는 4성급 호텔 운남(雲南)금화 국제주점 객실2208호를 배정을 받아 ROOM에 들어서니 고풍(古風)은 어느 호텔에 버금가나 너무 오래된 불편한 시설과 깨끗하게 정돈 된 침상 들은 어제 밤 싸우나 에서 지치고 4시간의 비행기 그리고 도착 하자말자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강행군한 피로는 몸을 씻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 11시40분경의 총무 영렬친구의 부름마저 거부 한 체 잠자리에 든 하루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4pt; mso-fareas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quot; &gt;03월09일 토요일 날씨 맑음(여행 셋째 날)&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4pt; mso-fareas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quot; &gt;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시차가 한 시간 늦은 호텔객실 어둠속에 시간을 가늠하기 힘든 탓에 몇 차례 휴대폰의 시간(時間)을 본다는 것은 잠을 설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코드 없는 샤워기며 수세식이 되지 않은 화장실(化粧室)등 오른팔의 장애로 시달리는 내게는 불편이야 많지만 7시경에야 밝아오는 아침에 6시30분에 호텔 내 조반이 준비가 더디지만 성격 급한 우리 일행 대다수가 5층 식당에 모여 앉아7시25분까지 관광버스에 탑승해야하는 시간들은 객실에서 차분한 시간이 많지 않아 분주하게 서둘러 차량에 탑승하자 인원점검을 끝낸 가이드는 간밤에 전기장판 덕택에 잘 주무셨냐는 인사부터 시작되며 차량은 아침 시간 때 이곳 금화호텔 주변의 도로는 지하철 공사에 전기의 지중화 공사가 한창이고 교통질서가 물란 하여 조금만 늦게 나오면 20여분 거리를 한 시간도 더 걸리기 때문에 여러분의 피로를 무릅쓰고 아침 일찍 서두르는 것이라며 곤명(昆明)이틀째의 여행이 시작 되는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 . 루난 스린(路南石林)= 운 남 석림(雲南 石林)&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class=바탕글&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2445723A51B419BB15&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exif=&quot;{}&quot; actualwidth=&quot;755&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755&quot;  id=&quot;A_2445723A51B419BB153B99&quot;/&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오늘 첫 번째 여행코스는 곤명(昆明)시내에서 약120km 떨어져 있는 루난스린(路南石林)이라 고도하는 운남 석림(雲南石林)이란다. 시원하게 포장된 도로변의 농촌(農村) 정경은 유난스런 가이드의 경험담과 방송과 한 번도 한국에 와본 경험도 없지만 재치 있는 논리로 이야기를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시야의 농촌(農村)전경은 한국에 4월 초순쯤에나 있을법한 수형(樹形)도 정비 되지 않은 배꽃(梨花)이 만개 됬 고 복숭 아 꽃이며 가뭄에 시달린 듯한 완두콩이 곳곳에 전개(展開)되기를 한 시간 반쯤 지나 목적지 운 남 석림(雲南石林)에 도착하니 색 붉은 접 꽃 복숭아꽃이 석림(石林)의 운치를 더하였고 이곳에서 석림(石林)입구 까지 현지 돈 25원(왕복) 하는 전동차 을 탈것이며 금차 여행비(旅行費)에 빠져있지만 추 가돈을 받지 않고 내석림 관광을 시켜 드리며 가이드가 쏘겠다며 환영에 박수를 유도하여 우리일행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이곳 운 남 석 림(雲 南 石林)은 곤 명시(昆明市)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천하제일의 기괴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으로 2억 칠천 만 년 전 바다 속이였던 석림(石林)은 이후 탄산칼슘 으 성분이 많아 지각 변동을 거치며 해발 1,750m 의 고도를 자랑하며 기상천외한 다양한 돌들이 높이는 일반적으로 5~10m, 가장 높은 것은 30~40m 에이 르 며 대략의 넓이는 평균 약 5k&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 &gt;m&lt;/SPAN&gt; 의 대소 석 림은 핵심으로 가장 다 체 로 운 모양들의 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석 림(石林)부근에 유명한 관광지가 많아 2007년 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世界自然遺産)으로 지정 되었단다. 전동차(電動車)에서내려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기괴한 돌들이 대석 림(大石林), 소석 림(小石林) 길 남쪽으로 400k&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 &gt;m&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8pt&quot; &gt;2&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 &gt; &lt;/SPAN&gt;나 되는 서울면적의 절반정도 구역에 연회색 산림과도 같은 수백 개의 2~3층 돌탑 같은 커다란 돌들이 놓여 있다. 홀로 서있는 것도 있고 가로 세로 엇갈려 하나로 이어진 것도 있다. 그중 유명한 이 자정 석림(돌숲석림)은 면적이 12k&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 &gt;m&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8pt&quot; &gt;2 &lt;/SPAN&gt;이고 기괴한 돌들이 천하제일의 기이한 풍경 이라고 일컬어진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곳은 석 림 호수, 대석림, 소석림, 리자원, 등 몇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당승석(唐僧石), 팔계석(八戒石), 장군석(將軍石), 오공석(悟空石), 관음석(觀音石), 사승석(沙僧石), 사병석(士兵石), 등 이 있고 종석(宗石)이라는 돌은 두드리는 위치에 따라 여러 음의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 이 단다. 관광 여정은 석림 풍경 구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며, 돌기둥, 석벽, 돌 봉우리가 온갖 자태로 기이함과 아름다움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수많은 인파등과 서로가 좋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진풍경은 단체 관람으로 한 커트의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한자리 모이는 것 조 차도 어렵게 진행(進行)하고 저 위쪽 석 림(石林) 위에 지어진 누각(樓閣)의 전경을 찾아 가보는 석굴(石窟)또한 꼬불꼬불 작은 길을 따라 걷노라면 미궁선경(迷宮仙境)에 들어 선듯 한 황홀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곳에서 나와 연못을 낀 웨 호(月湖)경관은 또 하나의 작품에 매료되어 50여분의 관람이 진행되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중식(中食)에 오늘도 둥근 원탁에 마련 된 오리구이 점심은 가이드가 곁들여주는 김치와 버섯무침 그리고 친구들이 준비해온 한국의 고추장은 미키한 중국요리(中國料理)의 맛을 개운(開運)하게 하는데 가 일층 이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점심이 끝나기가 바쁘게 서둘러 이동한곳은&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 &gt; &lt;/SPAN&gt;운 남 석 림(雲南石林)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향동굴”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잔잔한 협곡에서 뱃놀이와 종유석과 석순들이 장관을 펼치는 동굴이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 .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구향동굴(九嚮 洞窟)&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class=바탕글&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2618903651B41A070D&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exif=&quot;{}&quot; actualwidth=&quot;566&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566&quot;  id=&quot;A_2618903651B41A070DC770&quot;/&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구향동굴”&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 &gt; &lt;/SPAN&gt;은 곤명(昆明)시내에서 약90km 떨어져 있는 중국(中國)최대의 석회암(石灰巖) 동굴 대(洞窟地帶)로 그 면적이200km2나 되며 중국에서제일 규모가 크고 종유(從遊) 등 경관(景觀)이 기묘한 동굴(洞窟)굴락 지로“종유동굴박물관”이라고도 부른다. 아쉬움이 있다면 석순이 거치고, 종유석이 아름답지를 않으며, 죽어 있는 상태의 석회암동굴(石灰巖洞窟)이라며 이곳이 한국 사람들에게 더욱 매료되는 것은 배우 김희선이 중국(中國)의 명배우(名俳優) 성룡 과함께“ 신화(神話)”라는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撮影)하였다고 영화 포스터 사진들이 안내판에 게시되어 가이드가 안내하는 것을 뒷받침 하여주고 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구향동굴(九嚮洞窟)의 관람을 위해 우리일행이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시각 14시 50분 동굴(洞窟)내로 들어서니 지금 이 순간에도 석순이 자라나고 있는 듯한 느낌 속에 찬란한 조명이 더욱 신비스런 모습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넓은 기이한 경관이 수억 년 전으로 우리의 머릿속을 되돌리게 한다. 조금 더 진입하니 그곳 민속 공연단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 속에는 이곳 이족(異族)들의 오랜 풍습과 전설들이 우리가 이해 할 수 없고 노랫말의 의미를 모르니 그저 그럴 것이라고 추측만 해보며 민속공연을 잠시 보다가 사람들이 진행하고 우리일행의 모습을 따라 계단 길로 오르내리면서 관광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말하는 경남남해(慶南南海)의 다랭이 논을 연상시키는 동굴안의 올망졸망 연출된 다랭이 논의 모습은 아무래도 자연이 이루어 지지 않은 인공적인 손길로 만들어진 느낌을 받으며 계단을 오를 때는 가마꾼들이 모여 있으면서 호객 행위를 한다. 만원! 만원! 하면서 말이다. 3백여 계단으로 된 곳을 오르려면 오르는 것이 무척 힘들기 때문에 노약자나 걷기가 힘든 사람들은 이가마를 용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가마를 타려거든 가이드에게 이야기하라고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가마꾼들이 만원이라고 하고서는 도착지에 이르면 이만 원을 요구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가마꾼이 한 팀인지라 한 사람당 만원에 두 사람 분 2만원을 요구하는 것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 주관적(主觀的)인 생각으로 하는 말에 결국은 피해를 보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조금 더 지나니 박쥐 동굴이 나오고 그 동굴을 지나면 동굴(洞窟)밖이 된다. 이 구향동굴(九嚮洞窟) 은 6억 년 전부터 형성 되었다고 하니 6억 년 전의 모습을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역사의 공간(空間)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소는 급한 경사를 오르는 것이 나에게도 쉽지는 않다. 헉헉 숨이 차며 계단을 오르다 보니 종유석과 석순들이 오색의 불빛에 비추어 아름답다고 표헌 하기 보다는 신기한 감탄사(感歎詞)로 이어지는 풍경을 후래 쉬를 터뜨려 사진에 담기는 역 부족인 것 같다. 박쥐 동굴을 지나면서 보니 천정에 붙어 있는 석순(石筍)들이 마치 박쥐가 천정에 매 달린 듯한 모습에서 지여진 이름 인 것 같다. 특히 이곳을 풍취석만(風吹石彎) 이라고 도 부른 다는데 이것은 동굴(洞窟)속의 기압(氣壓)의 변화로 기류가 형성되고, 동굴 천정에 맺힌 물이 오랜 기간에 걸쳐 작용하여 종유석과 석순이 지금의 모습으로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제주도며 강원도에 동굴이 있지만 역시 대국(大國)인 중국(中國)에 있는 장가계 코스에 황룡동굴(黃龍洞窟)이며 구향동굴(九嚮洞窟)에 비유 할 수가 업는 것을 느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2000년4월에 준공(竣工)했다는 높이 53m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니 선착장(船着場)에 관객들이 줄을 지여 서 있어 우리 일행도 그곳 입구에서 나누어준 노란색 구명(求命)조끼를 입고 순서를 따라 가이드의 안전설명은 관심 없고 12~3명이 탈수 있는 조그마한 나룻배에 올랐다. 벼랑에는 음취 협(蔭翠峽)이라고 큼직하게 세 겨져 있다. 이곳은 원래 하나의 신으로 이여 져 있었으나 카몬스트 지형인 이곳에 지하수맥(地下水脈) 이 흐르면서 동굴(洞窟)이 되었다가 그것이 무너져 내려 현재와 같은 협곡(峽谷)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서서히 나룻배가 움직이는 것은 현지의 부부 같은 남녀가 뱃머리 올라 열심히 노를 젓더니 젊은 여인네가 중국풍의 귀에 익은 유창한 노래를 불러 우리 일행의 박수를 받더니 더욱 흥이 나서 몇 곡의 노래를 부르기에 팁으로 2,000원 을 주었더니 감사 합니다, 하면서 계속하여 분위기를 따라 또한 우리 동반자가 팁을 주어 즐거운 분위기의 나룻배 놀이는 20여분 넘게 하였다. 이 협곡(峽谷)의 물의 깊이는 14.5m정도에 그리 넓지 않은 600여m 길이에 물은 많이 혼탁 하여 석회성분이 탓인가? 그러나 운치 좋은 협곡의 경관(景觀)이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협곡(峽谷)의 뱃놀이를 끝내고 계곡(谿谷)처럼 폭포수 물소리에 맞추어 한참을 걸어 내려가니 동굴 밖의 햇빛이 우리를 반기고 10여분 걸어 나가 가이드의 인원 점검이 끝나고 이동하는 곳은 250여m 에 이르는 에스 컬레이터 를 타고 구향동굴(九嚮洞窟) 입구방향으로 이어지는 2명이 한조가 되어 타고 가는 관람코스는 어쩌면 힘들어하는 구향동굴(九嚮洞窟내의 피로를 한꺼번에 풀어주는 느낌이다. 에스컬레이터 종착(終着)출구에서 걸어서 5분여 우리가 타고 온 관광버스에 오르니 상당히 피로감을 느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이국땅 여행코스에 참으로 자랑 스런 한 친구가 있다. 표현이 잘못 됬을 여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시한부(時限附) 인생을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닌 건강이 좋지 않은 와이프를 행여 마지막 이 될 수도 있다며 휠체어 까지 한국에서 실고 다니며 힘든 여행 코스에 함께 동행 하며 부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는 윤 오환 친구의 자랑스러움이 말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16시50분경 우리를 탑승시킨 버스는 들에는 농부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농촌 전경(前景)을 끼고 돌아 한 시간 반가량 달리며 이곳 곤명(昆明)시내의 아파트 값은 56m2에 8천만 원에 꾀나 비싼 집을 구입하였다는 자랑도 곁들이며 한참을 달린 차량은 안내 가이드의 부인이 부장으로 근무한다는 열대 고무나무가 있는 인도의 주산지와 이곳남부지방에서도 자라는 고무나무에서 추출된 액으로 만든 정품을 싸게 판다는 라텍스 공장에 안내되어 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 홍보부장의 설명 끝에 분위기상 서로의 눈치만 살피더니 그래도 새로 개발된 라텍스 이불이며 몇몇 친구들의 구매덕분에 생기가 난 가이드 의 표정을 보면서 그곳 근처에서 제공된다는 한국식 식탁의 저녁 식사자리에서는 삼겹살이며 이곳사람들은 생 상추를 먹지 않은 다는데 우리 입맛에 맞는 삼겹살 구이식사자리가 푸짐하게 진행 되었고 식당 옆 농산물(農産物)전시장에서 대다수의 한사람들이 중국(中國)에 여행 왔을 때마다 구입해가는 참깨며 잣, 등 을 쌤 풀만 보고서 가이드에게 주문하라며 5kg들이 에 35,000원인데 33,000원씩으로 대다수가 구입해가는 시간을 30여분 우리 일행이 관광버스로 이동하는 것은 오늘의 일정의 마지막 스케줄인 곤명(昆明)시내 에 있는 발 맛 사지 를 받기위해 도착한시간은 현지시간 19시 20분에 도착 가이드의 기분이 흐뭇한 탓일까 40분 받기로 된 발 맛 사지 를 가이드의 사비를 들여 1시간 30분 받는 전신 맛 사지로 우리의 마음을 충족시켜주는 여유로 현지시간 21시 20분경 오늘 하루의 여행도 끝나는 숙소인 금화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에 들어간 일행 중 몇몇 사람들이 그냥 지나 칠 수 없다며 나도 함께 자리하자는 제의에 장애(障碍)의 후 휴 증으로 그토록 제재해왔던 술자리를 밤 한시가 되도록 함께하고 내일을 위한 생각도 해야 했기에 2208호의 숙소를 찾아 오늘 하루의 일정을 끝내는 하루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4pt; mso-fareas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quot; &gt;03월10일 일요일 날씨 맑음(여행 넷째 날)&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오늘아침은 다소 바쁘다, 오늘은 숙소에 둔 여행용가방들을 챙겨 나와야 하는 곤명(昆明)에서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현지시간 5시50분의 기상보다는 좀 더 일찍 서둘러 가볍게 샤워를 하고 6시30분부터 시작되는 호텔식 조반을 먹고 집사람이 챙긴 가방들을 끌고 7시50분에 관광버스에 모두가 함께 탑승하여 곤명(昆明)에서 동북쪽으로 7km떨어져 있는 밍펭산(名峰山)위에 위치한 도교사원인“ 금전(金殿)” 이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 mso-ascii-font-family: 휴먼옛체&quot;&gt;★★★. 금전(金殿)=&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옛체; FONT-SIZE: 13pt; mso-fareast-font-family: 휴먼옛체; mso-hansi-font-family: 휴먼옛체&quot; &gt;(태화 궁: 太和 宮)&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1602년 명나라 때 지어진 도교사원으로 중국(中國)의 4대 동전(銅殿:구리로 만든 전당)중 하나로 보존(保存)이 가장 잘된 동전(銅殿)이다. 계단에 오르니 태화 궁(太和宮)이라는 현판(現版)이 보인다. 문안으로 들어서니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영성 문이다. 그 안으로 들어서니 정원(庭園)이 조성 되어 있고 양편에 건물의 안내판이 있고 또 하나의 태화 궁(太和宮)이라는 건물(建物)이 있다. 이것이 진짜 태화 궁(太和宮) “금전 (金殿)”이다. 오늘날 “금전(金殿)”으로 부르는 태화 궁(太和宮)은 원래는 동전(銅殿)이라고 했다고 한다. 건물의 기둥과 지붕은 물론 대들보와 문 까지도 청동(靑銅)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이건물이 건축될 당시 청동 빛이 마치 금빛처럼 보여 “금전(金殿)”이라고 불럿 던 것이 오늘날까지 “금전(金殿)”으로 부른다는 안내판의 소개다. “금전(金殿)”의 다른 이름은 태화 궁(太和宮)으로 곤명(昆明)으 명봉 산(名峰山)에 위치하고 있으며1602년 운남(雲南)순무 진 용빈 이 무당 산에 있는 태화 궁(太和宮)진무 전 을 모방해서 건축 했고 명나라 1367년 “금전(金殿)”을 명봉 산(名峰山)에서 계족산으로 옮겨 그 후 청나라 1671년 에 오삼계 가 이곳 명봉 산(名峰 山)에 “금전(金殿)”을 중건(中建)하였다. 이“금전(金殿)”은 중국에 현존하고 있는 최대 의 동전(銅殿)이며 진무의상과 진무칠성보검, 오삼계대도, 가 보존한다. “금전(金殿)”의 작은 연못 가운데는 여인상이 하나 서있는데 이 여인이 진원 원상 이라고 한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 여인들과 왕의 총예를 다툰 것이 현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불교에 귀의(歸意)하였다고 한다. 우리일행도 작은 연못 상 위치에서 사진촬영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금슬 좋은 부부사이 서로 서로 기념사진을 찍고서 밖으로 나오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현 지식을 먹기 위한 식당인 상선주류(商仙酒類)라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가이드가 보충해준 김치와 버섯무침 그리고 일행들이 준비해온 고추장등으로 현지 식 과함께 불편하지 않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이 다음 코스를 위에 버스에 탑승하고 인원을 파악 후 출발하는 시각 11시 45분 시내의 거리는 한산한 일요일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 위엔 통스(圓通寺)=원통사(圓通寺)&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정차한 버스에서 내려 10분여 걸어서 다음 코스인 1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곤명(昆明) 최대의 사찰 원통사(圓通寺)에 도착 한 시간은 12시10분경 위엔통스(圓通寺)는 쿤밍시(昆明市)의 북쪽 원통가(圓通街)의 중간 부분에 있으며 원통 산(圓通山)으 남쪽 자락에 위치한 곤명(昆明)에서 가장 큰 사찰(寺刹)로 당 나라 때 세워졌으며 이곳에는 관세음보살이 없으며 석가모니(釋迦牟尼)가있으며 그 옆에는 간왕과 그 아들이 모셔져 있는 것이 특징이이며 황용과 청용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명(明)나라 때 황제(皇帝)가 보름 동안 피신해 있을 때 보존 된 것이란다. 처음에는 부타뤄쓰(補陀羅寺)라고 했으나 원(元) 나라 때인 1301~1319년 중건 되면서 현재의 명칭인 원통사(圓通寺)로 바뀌었다. 청(淸)나라 초기에 팔각정(八角亭)을 세웠으며, 각종 건물들이 보수 되었다. 지금은 성 불교협회(省佛敎協會)가 자리하고 있다. 연못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건물이 지여져 있는데, 천왕 전(天王殿), 원통보전(圓通寶殿),팔각정(八角亭)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팔각정(八角亭)은 원통보전(圓通寶殿)앞 연못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로 내부에 천수관음상(千手 觀音像)과 옥 불상(玉佛像)이 있다. 원통보전(圓通寶殿)뒷 편에는 태국의 건축양식 인 동 불전(銅 佛 殿)이 있는데 안치된 동불상은 태국의 국왕이 선물(膳物)한 것이란다. 12시 30분경원통 사(圓通寺)관람을 마치고 교통이 혼잡한 이곳에 우리의 관광버스의 주차가 불편하여 쫒기 는 듯 탑승하여 이동 한 곳은 다음 이동 장소인 취 호 공원으로 이동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취 호 공원(公園)&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12시35분경 호수에 있는 4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된 취호 공원에 도착하여 호반의 경관을 조망(眺望)하는 데는 10여분에 불과했고 오늘의 일정표(日程表)에 있는 중국 윈난[雲南(운남) 성 쿤밍[昆明(곤명)시에 있는 시립 박물관으로 1951년 문을 열었으며 청동기시대부터 중세시대까지 역사에 관한 유물을 비롯해 종교와 자연사, 윈난 지역 소수 민족의 유품 등 다양한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는 종합 박물관으로 주요 전시물은 1972년 이가산고묘군(李家山古墓群)에서 발굴된 청동기를 비롯해 윈난 성 일대에서 발굴된 공룡 화석 등 자연사(自然史) 관련 유물(遺物) 등이다. 3층 건물의 박물관은 각 층별로 2개씩 모두 6개의 전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윈난 성의 상징으로 기원전 300년경 제작된 황소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호랑이 동상인 &amp;lt;뉴후퉁안[牛虎铜案(우호동안)] 원본&amp;gt;이 있는 것으로 유명(有 名)한다는 운남성 박물관(雲南城博物館)은 유물(遺物)이 별로 없다며 취호 공원 건너편에 있는 일정표에 없는 운남 육군강무 당(雲南 陸軍 講武堂)으로 안내되는 시각은 12시 45분 경이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v:shapetype id=_x0000_t75 stroked=&quot;f&quot; filled=&quot;f&quot; path=&quot;m@4@5l@4@11@9@11@9@5xe&quot; o:preferrelative=&quot;t&quot; o:spt=&quot;75&quot; coordsize=&quot;21600,21600&quot;&gt;&lt;v:stroke joinstyle=&quot;miter&quot;&gt;&lt;/v:stroke&gt;&lt;v:formulas&gt;&lt;v:f eqn=&quot;if lineDrawn pixelLineWidth 0&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1 0&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0 @1&quot;&gt;&lt;/v:f&gt;&lt;v:f eqn=&quot;prod @2 1 2&quot;&gt;&lt;/v:f&gt;&lt;v:f eqn=&quot;prod @3 21600 pixelWidth&quot;&gt;&lt;/v:f&gt;&lt;v:f eqn=&quot;prod @3 21600 pixelHeight&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0 1&quot;&gt;&lt;/v:f&gt;&lt;v:f eqn=&quot;prod @6 1 2&quot;&gt;&lt;/v:f&gt;&lt;v:f eqn=&quot;prod @7 21600 pixelWidth&quot;&gt;&lt;/v:f&gt;&lt;v:f eqn=&quot;sum @8 21600 0&quot;&gt;&lt;/v:f&gt;&lt;v:f eqn=&quot;prod @7 21600 pixelHeight&quot;&gt;&lt;/v:f&gt;&lt;v:f eqn=&quot;sum @10 21600 0&quot;&gt;&lt;/v:f&gt;&lt;/v:formulas&gt;&lt;v:path o:connecttype=&quot;rect&quot; gradientshapeok=&quot;t&quot; o:extrusionok=&quot;f&quot;&gt;&lt;/v:path&gt;&lt;o:lock aspectratio=&quot;t&quot; v:ext=&quot;edit&quot;&gt;&lt;/o:lock&gt;&lt;/v:shapetype&gt;&lt;v:shapetype id=_x0000_t75 stroked=&quot;f&quot; filled=&quot;f&quot; path=&quot;m@4@5l@4@11@9@11@9@5xe&quot; o:preferrelative=&quot;t&quot; o:spt=&quot;75&quot; coordsize=&quot;21600,21600&quot;&gt;&lt;v:stroke joinstyle=&quot;miter&quot;&gt;&lt;/v:stroke&gt;&lt;v:formulas&gt;&lt;v:f eqn=&quot;if lineDrawn pixelLineWidth 0&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1 0&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0 @1&quot;&gt;&lt;/v:f&gt;&lt;v:f eqn=&quot;prod @2 1 2&quot;&gt;&lt;/v:f&gt;&lt;v:f eqn=&quot;prod @3 21600 pixelWidth&quot;&gt;&lt;/v:f&gt;&lt;v:f eqn=&quot;prod @3 21600 pixelHeight&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0 1&quot;&gt;&lt;/v:f&gt;&lt;v:f eqn=&quot;prod @6 1 2&quot;&gt;&lt;/v:f&gt;&lt;v:f eqn=&quot;prod @7 21600 pixelWidth&quot;&gt;&lt;/v:f&gt;&lt;v:f eqn=&quot;sum @8 21600 0&quot;&gt;&lt;/v:f&gt;&lt;v:f eqn=&quot;prod @7 21600 pixelHeight&quot;&gt;&lt;/v:f&gt;&lt;v:f eqn=&quot;sum @10 21600 0&quot;&gt;&lt;/v:f&gt;&lt;/v:formulas&gt;&lt;v:path o:connecttype=&quot;rect&quot; gradientshapeok=&quot;t&quot; o:extrusionok=&quot;f&quot;&gt;&lt;/v:path&gt;&lt;o:lock aspectratio=&quot;t&quot; v:ext=&quot;edit&quot;&gt;&lt;/o:lock&gt;&lt;/v:shapetype&gt;&lt;v:shapetype id=_x0000_t75 stroked=&quot;f&quot; filled=&quot;f&quot; path=&quot;m@4@5l@4@11@9@11@9@5xe&quot; o:preferrelative=&quot;t&quot; o:spt=&quot;75&quot; coordsize=&quot;21600,21600&quot;&gt;&lt;v:stroke joinstyle=&quot;miter&quot;&gt;&lt;/v:stroke&gt;&lt;v:formulas&gt;&lt;v:f eqn=&quot;if lineDrawn pixelLineWidth 0&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1 0&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0 @1&quot;&gt;&lt;/v:f&gt;&lt;v:f eqn=&quot;prod @2 1 2&quot;&gt;&lt;/v:f&gt;&lt;v:f eqn=&quot;prod @3 21600 pixelWidth&quot;&gt;&lt;/v:f&gt;&lt;v:f eqn=&quot;prod @3 21600 pixelHeight&quot;&gt;&lt;/v:f&gt;&lt;v:f eqn=&quot;sum @0 0 1&quot;&gt;&lt;/v:f&gt;&lt;v:f eqn=&quot;prod @6 1 2&quot;&gt;&lt;/v:f&gt;&lt;v:f eqn=&quot;prod @7 21600 pixelWidth&quot;&gt;&lt;/v:f&gt;&lt;v:f eqn=&quot;sum @8 21600 0&quot;&gt;&lt;/v:f&gt;&lt;v:f eqn=&quot;prod @7 21600 pixelHeight&quot;&gt;&lt;/v:f&gt;&lt;v:f eqn=&quot;sum @10 21600 0&quot;&gt;&lt;/v:f&gt;&lt;/v:formulas&gt;&lt;v:path o:connecttype=&quot;rect&quot; gradientshapeok=&quot;t&quot; o:extrusionok=&quot;f&quot;&gt;&lt;/v:path&gt;&lt;o:lock aspectratio=&quot;t&quot; v:ext=&quot;edit&quot;&gt;&lt;/o:lock&gt;&lt;/v:shapetype&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fareas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quot; &gt;★★★. 운남 육군강무 당(雲南陸軍講武堂)&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청일 전쟁에 패배 한 청나라 정부는 신군을 확대 개편하기 위하여 1985년 리 홍창 이 북양무비학당(北洋武備學堂)을 만들어 신군(新軍)을 편성하고 중국전국(中國全國)으로 이를 보급한다. 운남(雲南)에서는1899년 육군무비학당(陸軍武備學堂)이 설립되어 이학교가 바로 운남 육군강무 당(雲南陸軍講武堂)의 전신이다. 이학교의 졸업생(卒業生)중에는 한국의 제1대 국무총리(國務總理)겸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을 지낸 이범석(李範奭: 당시 가명 李國根), 월남임시정부주석 무 해추(武海秋), 조선인민군(朝鮮 人民軍)총사령관(總司令官)겸 조선(朝鮮)민주주의(民主主義)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부주석(副 主席) 최고인민회의(最高人民會議)상무위원장(常務 委員長)을 지낸 최용건(崔庸建)원수(元首)등도 이 학교 출신이다. 이 군사학교가 바로 운남 육군강무 당(雲南陸軍講武堂)이다. 1909년 에 설립되어 1395년까지 26년간 모두 8313명의 졸업생(卒業生)을 배출했다. 1935년 이후에는 이곳이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陸軍軍官學校)곤명분교(昆明 分校)가 되었다가 중앙육군군관학교 곤명 분교 즉 황포군관학교(黃布軍官學校)곤명분교(昆明分校)가 되었다가 1938년1월에 다시 황포5분교로 개칭(改稱)하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이범석(李範奭)이 운남 강무 단(雲南講武團)에 들어 갈 때는 비밀리에 들어갔다. 그때나이15(1916년)세 때 중국(中國)]으로 와서 상해에서 韓國獨立運動 의 지도자인 신 규식과 손 중산 간의 연락원을 맡았다. 당시 상해에 망명해와 있던 한국임시정부(韓國臨時政府)는 중국에 군사인재를 키워달라고 요구한다. 이범석은 바로 이런 경로를 통하여 운남 강무 단(雲南 講武團)으로 오게 되어 손 중산 이 당계요 장군에게 부탁하여 이범석(李範奭)을 비밀리에 입학하게 해준다. 당시에는 조선월남(朝鮮越南)의 혁명(革命)청년(靑年)이 강무당(講武堂)에 입학 한 것은 기밀사항(機密事項)이였고 당계요만 알았고 교장도 교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1919년 일본 점령군에 오래 동안 점령 당해있던 조선국왕(朝鮮國王)고종(高宗)이 서거 하여 장례식(葬禮式)때 대규모 3.1운동이 벌어진다. 이범석(李範奭)등은 급히 반일(反日)사업에 뛰어들기 위하여 당계요 에게 서신을 보내어 우리가 운남 에서 배운 실력을 이때 공헌 하지 않으면 언제 공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각하(閣下)께서 우리가 귀국하도록 동의 한다면 조국독립(祖國獨立)에 우리 민족은 당신의 은덕을 영원히 기억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범석(李範奭)은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중국동북(中國東北)으로 가서 중국조선국경지역에서 유격대(遊擊隊)를 조직하고 항일운동(抗日運動)을 벌인 그때 나이가 20살 이였다. 그가 지휘한 가장 유명한 전투는 1920년10월의 청산리전투(靑山裏戰鬪)였다. 일본군 수천 명을 사상시켰다. 이것은 한국독립사상 대표적인 전투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臨時政府)수립 후 초대국무총리(初代國務總理)겸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이 되었고 그는 운남 강무 단(雲南講武團)을 떠날 때 약속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한민국 성립문(成立文)에서 는 중국에서 이미 고인(故人) 이 된 당계요 장군의. 이름을 거명하며 감사한다. 당 계요 는 88명의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훈장(建國勳章) 수여자중 한사람이다. 또한 운남 육군강무 당(雲南陸軍講武堂)출신으로는 한국최초 여자 비행사(飛行士) 도 태윤 이 이 강무 당(講武 堂)출신이며 1940년 한국 공군을 창설하고 1967년 작고한 권 기옥도 이 운남 육군강무 당(雲南陸軍講武堂)출신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3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 운남(雲南)민속촌(民俗村)&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중국(中國)은 한족(漢族)을 비록 하여 56개의 소수 민족이 집합된 다민족(多民族)국가 인데 그 중에서 운남 에서 상주(常主)하는 소수 민족의 수가 52개 민족에 거주하는 인구수가 5,000명 이상 되는 소수민족(少數民族)이 26개나 되어 운남은 소수민족 천국(天國)이 라고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운남 민속촌(民俗村)은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풍습(風習)과 전통가무(傳統家務)를 볼 수 있는 운남성(雲南城)곤명 시 남쪽8km떨어 진 곳에 있고 그 면적은약 135ha(2000무)입니다. 남쪽은 전지, 북쪽으로 는 유구한 역사 곤명, 서쪽으로는 저명한 서산풍경구가 있어 풍경이 아름답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1992년 2월18일 이곳 민속촌을 조성할 당시 민속촌내에는 운남(雲南) 26개 민족(民族)중8개 부족 마을에 . 민속촌내에는 1:1의 비례로 민족의 마을이 있는데 지금 이미 따이족,백족.이족.나시족,기노족,라고족,보랑족,와족등8개 민족의 마을이 건설(建設)되여 있다고 한다. 2007년 10월01일에 요족, 푸미족, 만족, 아창족, 리 수족, 회족, 몽고족, 경파 족, 하니 족, 독룡 족, 등 계속 증가되어 현재 까지 2,000무(약 135ha)의 광활한 면적에 각각 의 26개 마을로 확장되어 지어있고 민족단결광장(民族團結廣場), 민족가무(民族家務)연출 청, 민족 박물관, 민족 초상관등이 있는데 운남 민족의 일종 비춤이다. 민속촌에 들어서면 각 마을들이 정연 히 있고 민족특색이 서로 다르게 농후 하다. 원속 에 원이 있고 마을 밖에 마을이 있다. 그리 고 각 곳에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 있고 민족 특유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사람들로 부터 &amp;lt;인간선경&amp;gt;으로 불리 우고 있다. 또 민족단결광장,민족가무연출청,대형수상분천 및 막 영화, 풍미 음식점, 유람선 부두 등 시설이 있고 크고 작은 호수가 만들어져 운치가 더하며 그곳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다름 이 없다. 민속촌내에는 관광객들이 무료로 사용 할수 있는 관광차(觀光車)가 있다. 이렇게 민속촌(民俗村)을 만들어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의 자부심(自負心)과 긍지를 살려주면서 부가적으로 관광(觀光)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경제적 이득을 창출하는 중국고대(中國古代)소수민족(少數民族)사를 돌아보며 그 생활상을 엿 볼수 있었든 것이나 시간(時間)이 허락 한다면 전체마을 들을 돌아보면 싶지만 시간이 허락 되지 않아 8~9개 마을만 돌아보는 것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lt;/P&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바탕글&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바탕글&gt;약3시간 에 걸친 민속촌(民俗村) 여행은 계속해서 걷는 관람 이다보니 피곤에 지쳐 현지시간 16시50분에 대기 하고 있는 차량(車輛)에 탑승(搭乘) 하고 50여분 걸려 시내로 가는 여정은 모두가 피로에 치쳐 도착한곳은 이곳 곤명호의 최대양식장에서 양식하여 직접 키우고 가공하여 판매하고 있다는 진주 보석 매장이였다. 넓은 매장에는 한국어에 능통한 홍보원의 설명 과 점원들의 상술(商術) 속에 구입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도 정이 많고 잘 따라주는 분위기는 몇 사람들의 구매가 이루어져 약 40여분의 시간이 소비하고 이제는 이곳 곤명에서도 마지막 현지 식(現地食)으로 이름난 버섯 샤브샤브 안내되어 4개의 테이불 에 나뉘어 앉은 일행은 오후에 걷기도 많이 한 고됨 속에 40여분에 걸쳐 배불리 저녁 을 먹고 이제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스케줄인 발 맛 사지만 남았다. 주관 여행사의 부탁 때문일까 아니면 첫날의 비행기 연착으로 인한 탓일까 아무튼 재치 있는 현지가이드의 저녁 식사 후 맛 사지를 한다는 업소 “운천 수사(雲 天 殊 舍)” 로 가는 관광버스 내에서 그동안 많은 협조로 무사히 마친 37회 여행 객 여러분에게 감사한다는 인사와 함께 오늘도 US 달러 20불 한다는 발 맛 사지 를 충분한 시간도 있는 우리에게 가이드의 사비로 전신(全身) 맛 사지로 써 비스 해드린다는 한마디에 힘찬 박수를 받으며 곤명(昆明)에서의 피로를 함께 털어 버리고 우리일행이 곤명(昆明)비행장(飛行場)에 도착한 시각은 현지시간(現地時間) 밤12시가 좀 못된 시간 도착 하든 길로 그곳에서 구입하여 배달되어온 농산물(참깨, 잣 등)을 인수 받고 티켓 팅을 끝내준 가이드와 2박 3일의 아쉬움 정을 인사로 나누고 우리는 서로 해어지는 시간 이였다.&lt;/P&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바탕글&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4pt; mso-fareast-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quot; &gt;03월11일 월요일 날씨 맑음(여행 다섯째 날)&lt;/SPAN&gt;&lt;/P&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바탕글&gt;출국 수속을 끝낸 일행이 새벽 2시 출발하는 게이트에 대기하는 손님은 우리가 마지막 인 것을 느끼는 것은 출국 심사대(審査垈) 모두가 마감 정리에 부산한 것이다. 예정된 우리를 태우고 갈 MU2003 비행기에 탑승한 시간 01시40분 예정된 2시의 비행기는 어둠을 가르고 서서히 곤명(昆明)을 굉음을 뒤로하고 이륙 하였다.&lt;/P&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바탕글&gt;얼마 되지 않아 기내식이 배정되고 식사가 끝나자 모두가 잠자리에 드는 것은 당연한 상황 속에 단잠으로 피곤에서 깨어 날 때는 인천공항(仁川空港)이 가차 워 지는 기내(機內)안내방송 에 고국에 돌아오는 현지 이곳 시간은 곤명 보다 한 시간 이른 새벽 7시가 다되어서였으나 입국수속(入國手續)을 마치고 화물까지 찾고 보니 어언 8시가 다되어 서울 에 있는 회원들 과 그리고 각자 집을 찾아 헤어지는 4박5일의 일정(日程)은 고향 광주에 9명의 회원 들은 아침 8시40분 인천 공항 발 광주행 우등고속을 이용하여 광주종합 터미널에 도착하니 12시30분이였다, 또다시 각 지방으로 서로가 헤어져야하는 4박5일 여정이 최초 내가 추천하여 정해진 장소 곤명(昆明)여행은 첫날의 비행기 지연으로 불편이야 있었지만 모두가 후회 없는 분위기 속에 무사하게 끝난 것을 느끼며 우리 부부 역시도 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하고 이 여행기를 쓰면서도 비록 현지가이드의 현지역사소개가 거의 없어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고 그때 기억을 더듬어 가며 먼 한손의 장애(障碍)중에 시끄러운 관광버스 내의 녹음자료 그리고 현장(現場)을 사진(寫眞) 에 담아 참고(參考)삼아 훗날 여행의 기억을 길이 남기고자 나름대로 번뇌를 감수하며 기행문(紀行文)을 마치렵니다.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 너 그 러히 용서하시고 기행문을 참고하시기를 기대 합니다.&lt;/P&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바탕글&gt;
&lt;P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HY견명조; FONT-SIZE: 12pt;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ascii-font-family: HY견명조&quot;&gt;서기 2013년 03월 17일 기행문(紀行文)을 정리(整理)하며 鄭 燦 悅 記&lt;/SPAN&gt;&lt;/P&gt;
&lt;P&gt;&lt;/P&gt;
&lt;figure class=&quot;fileblock&quot; data-ke-align=&quot;alignCenter&quot;&gt;&lt;a href=&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0310334951B3FBC332?download&quot; class=&quot;&quot;&gt;&lt;div class=&quot;image&quot;&gt;&lt;/div&gt;&lt;div class=&quot;desc&quot;&gt;&lt;div class=&quot;filename&quot;&gt;&lt;span class=&quot;name&quot;&gt;유럽5개국여행기(수정J.hwp&lt;/span&gt;&lt;/div&gt;&lt;div class=&quot;size&quot;&gt;2.19MB&lt;/div&gt;&lt;/div&gt;&lt;/a&gt;&lt;/figure&gt;</description>
      <category>여행 이야기</category>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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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9 Jun 2013 15:03:4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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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2년 2월 20일 오후 06:0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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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br&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174822414F420C7D1B?original&quot; class=&quot;txc-image tx-blog-simple-img&quot; style=&quot;clear:none;float:none;&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320&quot; /&gt;&lt;/p&gt;&lt;p&gt;&lt;br&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163C7A414F420CD22E?original&quot; class=&quot;txc-image tx-blog-simple-img&quot; style=&quot;clear:none;float:none;&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320&quot; /&gt;&lt;/p&gt;&lt;p&gt;&lt;br&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blog/144E24414F420CEC17?original&quot; class=&quot;txc-image tx-blog-simple-img&quot; style=&quot;clear:none;float:none;&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320&quot; /&gt;&lt;/p&gt;&lt;p&gt;limjinnuyn year happy day&lt;br&gt;&lt;/p&gt;</description>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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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0 Feb 2012 18:08: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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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1년 11월 21일 오전 10:1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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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봉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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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1 Nov 2011 10:14:2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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